[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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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사건 전과자 이유로 더 큰 고난의 길 시작

남편 걸어온 발자취… 아내, 자랑스럽게 여겨

때는 1932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승리한 해였으며, 각 학교에는 학생들로 서기산에 있는 신사에 참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때였다. 그것은 호국신의 가호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한국 교계는 큰 시련에 직면했다.

이때 아버지 김경덕 목사는 양평에 살면서 근처에 있는 6개 교회에 겸임 목사로 바쁜 목회를 했는데 아들의 신학교 입학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김철훈은 평양신학교 때 훗날 목사가 된 박윤선의 뒤를 이어 학생회장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3년 동안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했다. 31세의 노총각이었던 그는 서울에서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신갈초등학교 교사이며 믿음 좋은 27세의 여선생을 소개받아 1935년 12월, 곽안련 목사의 주례로 평양신학교에서 각계각층의 축하를 받으면서 연금봉 선생과 결혼했다.

김철훈은 1936년 2월 제29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신의주 제2교회에서 청빙하는 것도 마다하고 먼저 사회 경험을 얻고자 숭실학교 교목으로 부임했다. 고생 끝에 학업을 마치고 세상에 첫발을 디딘 지 3개월 만에 만세 사건 전과자라는 이유로 더 큰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

김철훈 목사가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는데 일본 경찰이 와서 김철훈 목사의 등을 밀어 학교 밖으로 끌어냈다. 이유는 학생 사건으로 형무소에 갔던 사람이 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상이 불순한 요사찰인물이었다. 재학 시절 평양 만세운동의 주동자였으며, 김철훈 목사의 부친 김경덕 목사는 3·1 운동 때 3년 8개월의 옥고를 겪은 반대자요 민족주의 사상가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신혼인 아내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걸어온 발자취를 낱낱이 듣고는 오히려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김철훈은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에 부임했다. 용강읍교회는 역사가 있는 교회이며 김치근 목사가 계시던 곳으로, 풋내기 목사가 부임해서 조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용강읍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신앙적인 교회이기보다는 사교적인 점이 많았다. 그러나 김철훈 목사는 학교에서 배운 목회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기도와 말씀 증거, 심방을 통해서 교인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에 당국으로부터 교회 뜰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서사 낭독을 요구받자 “교회 문을 잠글지언정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겠다”라고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나 장로들은 그렇게 반대하면 교회 문을 닫아야 하므로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김철훈 목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내 신앙 양심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차라리 폐쇄된 예배당 문을 붙들고 기도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기를 게양하고 예배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장로들 태반이 비협조적으로 행동했으므로 김철훈 목사는 결국 그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때마침 박형룡 목사의 소개로 1938년 2월 평양에서 가까운 대동군 송산리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송산리교회는 전형적인 반농반상의 농촌교회였다. 교인들의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김철훈 목사의 목회도 자연히 뜨거워졌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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