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닭이 새벽에 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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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엔 닭을 여러 마리 키웠다. 새벽녘 동이 틀 무렵 닭은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가 목을 길게 빼고 꼬끼오 크게 울어 새벽을 알렸다. 자명종이 귀하던 시절 우리 집의 닭 울음소리는 농가의 아침을 알리는 알람의 역할을 해 주었다. 닭의 뇌에는 송과체라는 내분비기관이 있다. 이 송과체는 빛에 민감해 동쪽 산 넘어 해가 뜨기 전 이미 빛을 감지하고 크게 울어 새벽을 알렸던 것이다. 

‘새벽의 닭’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로는 ‘잠수함의 토끼’, ‘탄광촌의 카나리아’라는 말이 있다. 25시의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Constantin Gheorghiu)는 젊은 시절 잠수함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잠수함엔 산소 측정기가 없었다. 대신 산소 농도에 민감한 토끼를 데리고 들어간다. 산소 농도가 낮아지면 제일 먼저 토끼가 반응한다. 그러면 즉시 적절한 위치로 잠수함은 부상을 한다. 이 모습을 보고 게오르규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 공동체, 교회 등을 ‘잠수함의 토끼’라고 일컬었다. 마찬가지로 탄광촌에서는 작업을 하러 갈 때 일산화탄소와 메탄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한 마리 데리고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말이 나왔다. 

지난 33년 한소망교회는 ‘새벽의 닭, 잠수함의 토끼, 탄광촌의 카나리아’가 되고자 간단없이 몸부림을 해 왔다. 오늘 우리 시대 한국교회의 위기는 무엇인가?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꼭 한 걸음 앞에 길을 만들고, 때로는 시행착오도 해보고 여기에 길이 있다고 늘 외쳐왔던 것 같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어처럼 한소망교회의 목회는 오늘이 아니라 늘 미래였다. 

한소망교회 ‘오래된 미래’ 목회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첫째, 우리는 참여적 예배, 성령의 임재를 모든 성도들이 경험하는 예배이다. 전통 예배와 열린 예배 논쟁이 한창이던 그때 우리는 세계적인 예배 복고 운동의 예배학적 원리와 본질을 다 담은 참여적 예배를 만들고 경험하기 위해 매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둘째는 모든 성도가 소그룹 목장에 참여하여 초대교회 원형을 회복하는 목회이다. 종교개혁가들이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했을 때 모든 성도는 사역자, 목회자가 되는 평신도 중심의 목회를 주창한 것이었다. 이 소그룹 중심교회가 목회의 본질임을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모든 교회가 깨닫기 시작했다. 

셋째는 영성적 목회이다. 나는 33년 전 한소망교회를 개척하면서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라는 영성 훈련을 경험했다. 이 운동을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 신학적, 목회적 연구를 거듭하여 복음주의 개혁교회에 적합한 영성 훈련으로 자리잡도록 애를 써왔다. 지금은 ‘은혜의 동산’이라는 목회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한소망교회 영성의 큰 강물이 되었다. 

넷째는 알파 코스를 통한 불신자 전도와 성령 수양회를 통한 구원의 확신, 성령 세례를 경험하고 성령 충만의 감격적 신앙생활을 계속하도록 돕는 목회이다. 

다섯째는 영적, 정신적, 내적 상처와 약점을 치유받는 치유 수양회 프로그램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세상 줄을 끊고 회개를 경험하며 내적인 상처를 건강한 품성으로 바꾸어가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영적인 목회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시대 새벽의 닭 울음소리처럼,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종소리처럼 33년을 울려 퍼졌다. 세상이 어둡고 목회적 위기가 클수록 시대에 민감한 잠수함의 토끼, 탄광촌의 카나리아들이 일어나 새 길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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