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창] 德將 채명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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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4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국가안보가 절실한 이때에 2013년 86세로 별세한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로(예비역 3성 장군)가 새삼 떠오른다. 생전에 본보 안보특집을 서너 번 했었고, 또한 그의 회고록을 3년 여에 걸쳐 절찬리에 연재하기도 했었다. 그는 별세하면서 장성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를 원하는 유언에 따라 병사묘역에 묻혔다. 삼우제 때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 딸을 비롯한 유족들,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노병들이 추모예배를 드리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 모씨(76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 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 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 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 겸 북한군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적장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데려와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 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유명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도 은퇴해 두 사람은 채 장로가 숨질 때까지 우애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모 신문지는 적장의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갈등 해소와 남북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고 한다. 채 장군은 한국 태권도를 세계에 보급 발전시키는데 공로가 컸으며 주월 한국사령관직을 훌륭히 키워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면전에서 직접 반대하고 대장진급에도 탈락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으며 예편하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수많은 공적에도 장군묘역에 묻히길 거부하고 부하들이 있는 곳, 사병묘역에 묻히길 소망했던 장군, 적장의 간절한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장군. 적지의 고아를 기르고 키워내고도 끝내 비밀로 하고 간 채 장군, 절대자인 대통령의 면전에서 장기집권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신 장군. 채명신 장군이야말로 이 나라에 진정한 애국자이며 참된 신앙인이고 사나이, 참군인이 아닐까? 호국보훈의달과 6.25 74주년을 맞아 고인의 큰 뜻을 추모하며 이 어려운 때에 채  장로님을 다시 한번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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