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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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논리… 실패, 성공 위한 밑거름 안목 필요

허드렛일만 하던 당시 불안‧막막한 심정, 지나고 보니 충분히 견딜만한 시련

백화점 앞마당에 만국기가 가득 걸린 채로 바겐세일이 시작된 날,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물건을 싸게 살 기회라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우리는 매대 하나에 여름 옷감을 가득 쌓아 놓고 팔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쌀 때 사 놓았다가 날이 풀리면 옷을 지어 입으려는 사람들 덕분에 옷감은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요즘 말로 ‘완판’이 된 것이다.

사실 이 바겐세일 행사에 참여한 자체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어차피 자주 열리는 행사도 아니었고, 그 기간 안에 소비자에 직접 팔 수 있는 양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이 다음 시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며칠 후, 동대문시장 안을 걸어가는데 점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시장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점포인데 요 근래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위치에서 시장 최고의 매출을 올리던 점포인데, 세무조사 때문에 잠시 문을 닫은 것이라 했다. 그때는 세무조사를 받으면 일단 문을 닫았다가 한두 달 후 상호를 바꿔 다시 장사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나는 그 주인에게 찾아가서 두 달간만 우리에게 월세를 달라고 했다. 겨울 동안만 재고 바겐세일을 하겠다고 설명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백화점 바겐세일 행사처럼 만국기를 걸고 매대를 꾸며서 여름 치마저고리감 원단을 팔았다. 결과는 또다시 대성공이었다. 얼마 안 가서 작년 재고품은 다 팔았고, 최근에 개발한 잔품들까지도 꽤 팔 수 있었다.

본래 김교석 회장의 업체들은 동대문시장 안에 직영판매장은 두고 있지 않았다. 지금의 광장시장인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두고, 2층에는 여러 계열사 사무실 겸 점포를 두고 있었다. 내가 새로 맡은 점포도 여기 있었다. 동대문을 비롯해서 서울 여러 곳에 대형 창고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직영판매장을 두지 않은 것은 선경합섬, 방림방적을 비롯한 의류기업, 섬유공장들과 함께 신상품을 개발, 생산해서 전국 시장과 도매상으로 내보내는 비즈니스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건을 상시적으로 팔 수 있는 매장이 시장 내에 있으면 좋겠다는 필요성은 있었다. 개발한 신제품 원단 대부분이 도매상에 팔려나간다 하더라도 잔품은 생기고, 개발 상품 중에 인기 없는 것은 재고로 남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 소량씩 매장에 내놓으면 독특한 것을 찾는 사람들 눈에 띄어 팔릴 수 있는데, 그런 판로가 되어줄 매장을 마련해 놓지 못한 것이다. 그 시절 동대문시장에서는 목 좋은 자리 하나를 새로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섬유산업이 워낙 호황이었고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빌린 그 매장은 오히려 눈독 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일등 자리이기 때문에 주인이 포기할 리 없었던 것이다. 나도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 달 동안만 바겐세일을 하겠다며 접근했기 때문에 허락이 쉽게 된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문을 연 우리 매장은 기존에 있던 가게보다 더 큰 매출을 올렸다. 이미 다른 곳에도 사업체가 있었던 주인은 조금 더 운영해보라며 기간을 연장해줬다. 그렇게 두 달, 석 달씩 기간이 늘어나더니 결국은 1년 정도 되었을 때 우리의 고정 매장이 됐다.

이 매장을 확보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내 공로가 분명했으므로 나는 비로소 김교석 회사 사업체 내에서 한 명의 공동 운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지분 투자를 했다고는 하지만 생활비 정도나 받아갈 수 있는, 일반 직원보다 주인의식을 조금 더 가진 직원 정도 위상이었다. 얼마 후 김 회장이 계열사 하나를 정식으로 맡겼다. 드디어 내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허드렛일만 하면서 기약 없이 견디던 당시에는 불안하고 막막했지만, 지나고 보니 충분히 견딜만한 시련이었다.

돌아보면 신기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는 김 회장 주위를 겹겹이 싸고 있던 일가친척들이 철옹성처럼 보였고, 그들을 제치고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업이 성장할수록 그들은 작은 점포 또는 사업체를 맡아서 독립해 나갔다. 결국은 나만 남아서 김 회장과 내가 전체 사업체를 50대 50으로 공동 운영하는 형식이 됐다. 영업 감찰도, 은행 당좌계좌도 내 이름으로 개설이 됐다. 그만큼 책임도 커졌다.

김 회장이 내게 특별히 큰 기회를 준 적은 없었다. 기회를 준다면 친형제, 친척들에게 더 많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김 회장이라는 큰 나무의 그늘 아래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만 열심히 챙겼다. 반면에 나는 나그네가 허허벌판 광야에서 길을 찾듯이 집중하며 일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나의 경쟁력이 됐고, 능력이 됐다. 그로 인해 인정을 받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도 기댈 ‘빽’이 없는 것이 오히려 ‘빽’이 되기도 한다. 요즘 말로 흙수저, 금수저 같은 타령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일이 실패하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어봐서 안다면서 확실한 논리로 설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는 자세하게, 논리적으로만 설명하기가 어렵다. 직접 뛰어들어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낸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성공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의 논리가 매력인 것이다. 실패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성공을 위한 바탕으로 본다면 남들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다행히도 사업 세계에 발을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원리를 체득할 수 있었다.

사업이란 숲속의 나무와 같다네 

내가 처음 들어갔을 당시 김교석 회장의 회사는 훗날 내가 운영한 회사의 이름이기도 한 (주)보창이었다. 보창 밑에 분야별로 대림, 메트로, 협신 등 계열사가 여러 개 뻗어나갔는데, 내가 처음 맡은 회사가 ‘메트로 상사’였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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