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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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장년예배·여성반 맡아 전주 선교에 힘 실어

테이트 선교사는 조사의 강한 권유 때문에 더 이상 보행을 진행하지 못하고 은송리 마을로 돌아왔다. 테이트 선교사는 집에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 저희가 애써 뿌려 놓은 씨앗이 헛될까 걱정이 됩니다. 하루속히 안정을 되찾아 전주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도록 해주십시오.”

몇 번이고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 메티 테이트 선교사가 전보 한 장을 들고 테이트 선교사에게 다가왔다.

‘빨리 전주에서 철수하시오. 미국 영사’

테이트 선교사는 이 전보를 보고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전주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억울하기도 하였다.

할 수 없이 조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테이트 남매 선교사는 사태의 급박감을 느끼고 곧 군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등창의 침을 뽑아 주세요

청일 전쟁으로 국내는 몹시 어수선하였다. 사실 정부는 동학농민을 진압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지자 자연히 청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때 일본 군인들도 자신들의 백성을 보호한다며 상륙하자 결국 한반도에서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던 한국은 도처에 전쟁의 흔적이 남았다. 일본과 청나라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의 대가로 청군은 대만을 식민지로 내놓았다.

1895년 2월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이하 최의덕으로 표기) 선교사는 다시 전주로 와서 선교를 재개하였다. 그런데 전주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5~6명의 그 독실한 교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최의덕 선교사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면서 전주교회를 이끌었다.

우선 전주 선교를 활발하게 이끌기 위해서 은송리 언덕에 있었던 최의덕 선교사 주택을 중심으로 두 채의 초가집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선교사들이 와서 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전주 선교는 활기를 띠면서 해리슨(W. B. Harrison, 한국명: 하위렴, 이하 하위렴으로 표기) 선교사가 최의덕 선교사를 돕게 되었고, 또 얼마 후에는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이하 이눌서로 표기) 선교사가 전주로 이사하였다. 이로 인해 전주 선교는 지역을 확장하면서 선교의 영역을 넓혀 갔다.

하위렴 선교사도 전주 선교에서 크게 공을 남겼다. 하위렴 선교사는 1896년 11월 이미 초겨울 날씨인지라 북풍의 바람을 등에 업고 전주로 왔다. 그리고 그는 곧 최의덕 선교사 남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하위렴 선교사의 영역은 좀 달랐다. 하위렴 선교사는 일찍이 의과대학을 다닌 경험이 있었기에 전 주에 있는 자신의 집 한 칸을 내어서 약국을 운영하였다. 이곳은 훗날 전주 예수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연세 많은 할머니가 한 소년을 업고 왔는데, 하위렴 선교사는 이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등에 있는 이 침은 무엇입니까?

“등에 등창이 나서 이 애 아버지가 한의원에서 등에 침을 꽂아 놓았는데 계속 아이가 아프다고 하기에 선생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겁에 질린 하위렴 선교사는 조심스럽게 등에 꽂혀 있는 침을 하나둘씩 뽑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을 잘 조제해서 먹이게 한 후 그 곳에 다른 약을 발라 주어 돌려 보냈다. 그 후 어린 소년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하위렴 선교사의 약국을 드나들면서 치료에 열중하였다.

한 달 가량 치료를 하였는데 그의 등에 있던 등창이 깨끗하게 나았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너무 신기해서 그 소년을 데리고 전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전주교회에서 첫 세례식을 거행할 때 모자가 나란히 서서 다른 사람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소년이 훗날 목사가 되었는데 바로 김창국이란 사람이었다. 김창국은 하위렴 선교사의 은혜를 잊으면 안된다면서 하위렴 선교사의 사환 겸 조사로 그를 도왔다.

김창국은 토요일이 되면 전주천을 넘나들면서 주일에 주일학교가 개설된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녔다.

“야, 내일 전주교회에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해준대. 꼭 기억했다가 나와야 해.”

그런가 하면 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전주천을 넘어 전주 5일장에까지 가서 아이들을 모아 오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위렴 선교사는 주일학교를 맡았으며, 최의덕 선교사는 장년예배 인도를 맡았고, 메티 테이트 선교사는 여성반을 맡으면서 전주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는 약국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전북 지방에 있는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남자아이 들을 모아 놓고 주간 학교를 실시했던 것이 오늘의 전주 신흥 중·고등학교가 되었다. 또한 메티 테이트(한국명: 최마태, 이하 최마태로 표기) 선교사가 인도했던 아이들을 중심으로 문을 열었던 학교가 전주 기전여자중 · 고등학교가 되었다.

하위렴 선교사를 열심히 따라다녔던 김창국은 사환 겸 학생으로서 첫 전주 신흥학교 학생이 되어 그도 그 학교를 졸업하자 호남인으로서는 최초로 평양 유학을 하여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기도 하였다.

최마태 선교사의 집에 경사가 일어났다. 최마태 선교사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말씀을 가르치고, 꼭 기도를 한 다음 가정에 돌려보냈는데 어느 날 귀부인처럼 생긴 유씨 부인이 몸종을 거느리고 최마태 선교사의 집에 찾아왔다.

“선교사님, 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매일같이 남편한테 매를 맞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인은 최마태 선교사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최마태 선교사는 그의 울음을 통해서 그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서양 귀신한테 가라 했어

최마태 선교사는 그녀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녀는 최마태 선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모든 것이 진리임을 믿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되는 남편의 손찌검에 견디기 힘들어 했다.

“야! 이년아 누가 서양 귀신한테 가라고 했어.”

게다가 그의 시어머니까지 합세하여 그녀를 다그쳤다.

“그래, 서양 귀신이 그렇게 좋더냐? 그러면 그 서양 귀신하고 살지 여기에는 왜 와?”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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