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선배 선교사인 해리 씨 부부가 우리 부부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해요. 느긋해야 합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 사람에게는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두 번째로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느끼지 않고 참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의사는 보통 사람보다 위생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인의 비위생적인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사역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팔에 온 1년 차 선교사는 커피를 마시려고 할 때 파리가 커피잔에 빠진 것을 보면 놀라서 전부 쏟아버린다. 그런데 2년 차가 되면 파리가 커피잔에 빠진 걸 보더라도 그냥 건져내고 마신다. 3년 차가 되면 파리를 건져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 감히 파리가 내 커피를 마시고 있어?”
그러면서 티스푼으로 파리를 눌러 ‘커피 국물’까지 짜내서 마신다는 것이다. 첫해에는 파리를 더럽게 생각하지만, 3년만 지나면 파리에 묻는 커피까지 아깝게 느낄 정도로 현지 문화에 적응한다는 이야기였다.
네팔 언어를 배우며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기간에 체험한 일이다. 동기 선교사 일곱 명이 인솔자를 따라 몇 시간을 걸어서 티베트의 난민촌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인솔자를 알아보고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강권하여 모두가 그의 집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집주인이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컵 안을 엄지손가락으로 쓰윽 돌리며 닦아냈다. 그렇게 컵을 다 닦은 다음 큰 보온병에 든 티베트 차를 부어 사람들 앞에 놓았다. 하지만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살짝 맛을 보았는데 생애 처음으로 대하는 맛이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도저히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맛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 계속 있으려면 이걸 마셔야 한다. 티베트 사람들이 다 마시는 것인데 나라고 못 마실 건 뭔가?’
나는 눈을 딱 감고 숨도 쉬지 않고 다 마셔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컵을 내려놓자마자 주인이 다시 보온병을 들고 오더니 또 가득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포카라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숙소 부근에 있는 현지인 교회인 바그바잘 교회의 교인이 운영하는 네팔 특유의 찻집이 있었다. 하루는 그 찻집에 들렀더니 귀한 손님이 왔다고 반가워하면서 쪄나(콩 종류), 계란 프라이 그리고 찌야(네팔 홍차)를 대접해 주었다. 그 찻집 주인도 난민촌의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컵을 닦고 있었다. 조금 전에 다른 손님들이 사용한 유리컵을 한 손으로 뒤집어 쥐더니 이미 흐려진 물통에 컵을 넣고 두세 번 흔들다가 꺼내놓는다. 그런 다음 맨 바닥에 컵을 놓고 차를 따른 후 갖다주었다.
‘아! 이를 또 어쩌나?’
그 무렵 영국에서 온 간호사가 간염에 걸려 치료가 어렵게 되자 본국으로 후송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로 난감했다.
‘이 차를 그냥 마셔야 하나?’
정말 고민이 되었다. 나는 잠깐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고 교회가 보내주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난감한 형편에 처했습니다. 제가 네팔에서 사역하려면 앞으로도 이런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차를 마셨다.
하루는 카트만두의 병원 식당에서 겨우 걸음마를 하는 주방장의 딸이 식당 바닥에 굴러가는 콩 하나를 보더니 엎드려서 주워 먹는 것을 보았다. 네팔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손으로 코를 풀어 건물 기둥과 책상 모서리, 숄이나 옷자락에다 닦는다. 이곳의 먼지는 단순한 먼지가 아니다. 결핵균, 아베마, 기생충 알이나 기타 헤아릴 수 없는 박테리아 등이 있지만 어찌 알고 골라서 숨을 쉬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려면 그 주방장의 딸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