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때 속옷이 땀에 흠뻑 젖도록 힘써 설교
십자가 말씀 생각날 정도로 갖가지 고문 당해
김철훈 목사는 새벽기도를 강화하여 교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저녁이면 뒷산으로 올라가 밤새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통곡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이때 자주 묘향산이나 대보산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별장 뒤 동굴에 가서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다. 신사참배의 문제가 큰 쟁점이 되었다. 하루는 신사참배를 권유하기 위해 서장과 형사부장이 고평면에 들러서 면 산하 교회의 목사, 장로들을 모두 강당에 모으고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종교의식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종교의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오해이다”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이날 김철훈 목사는 준비했던 《신사도》(紳社道) 책을 들고 와서 책장을 넘기며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임을 입증하여 서장과 부장의 체면을 깎았다. 그래도 서장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도록 했는데 오직 김철훈 목사만이 손을 들었다. 연설이 끝난 후 김철훈 목사를 불러 경찰서에 가서 계속 토의하자는 요구를 했는데 김철훈 목사는 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경찰서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일날 예배 때 김철훈 목사는 어떻게나 힘을 써서 설교했는지 속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 교인들은 아무래도 이번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경찰서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교인들이 몰려와서 근심 어린 시선으로 목사님을 배웅했다.
서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형사부장이 김철훈 목사를 데리고 지하실 어느 무시무시한 방으로 데리고 갔다. 고문을 할 참이었다. 우선 김철훈 목사를 앉혀 놓고는 양다리를 뻗게 하여 그 위에다 걸상을 올려놓고 두 사람이 걸터앉아 다른 한 사람은 가죽띠로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팔이 아프면 다른 사람이 번갈아 치는데 눈빛과 행동이 악마같이 보였다. 김철훈 목사는 이때 아픔을 참느라고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목이 타올랐다.
그는 문득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갖가지 고문이 이어졌다. 한 시간쯤이 되자 발바닥이 부어올랐다. 그들은 김철훈 목사를 끌고 자갈이 깔린 방으로 가 계속 다니게 하였다. 부은 발바닥이 자갈에 닿을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참기 힘든 순간이었다.
견디다 못해 기절하니 감방 안으로 밀쳐 넣어 버렸다. 김철훈 목사는 한참 동안 의식을 잃고 넘어진 채 누워 있었다. 얼마 후에 눈을 뜨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죄수들이 이 사람이 살았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 무렵 교회에서는 김철훈 목사가 잡혀간 후 매일 밤 철야하며 부르짖었다. 이런 모임이 한 달쯤 계속되었다. 장로들이 모여 의논해서 “목사님이 혼자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고 있으니 우리가 자발적으로 들어가 같이 고생하는 것이 어떤가?” 신앙심이 좋은 신풍윤 장로와 홍봉식 장로가 경찰서로 찾아가 한 달쯤 억류된 후 풀려나왔다. 김철훈 목사는 그해 신사참배를 결의한 9월 27회 총회가 끝나자 9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당회원들이 김 목사를 모시러 갔는데 김 목사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의치를 해 넣었던 앞니도 빠져 버려 흡사 합죽이 노인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주님을 위해 자청한 고생인데 무슨 말로 표현할꼬? 고생이 영생인 걸 미처 몰라 눈물만 흘렸다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