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아까웠던 금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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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들어 여러분을 건져 주었다면 여러분은 그분에게 무엇으로 답례를 하시겠습니까? 하물며 피 흘려 목숨을 다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으로 감사의 예를 표해야 되겠습니까?”

매주 강단에 서서 외치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 왔지만 지난 주일처럼 마음 속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처음인 것 같았다.

‘오는 감사주일에는 내가 금덩어리를 꼭 바치리라.’ 창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감격한 마음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바로 그 다짐을 오늘 주저하지 않고 결행을 한 것이다.

‘나의 진심을 주님께서는 아시겠지…’

그런데 어쩐지 마음이 떨떠름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랬나보다 하는 엷은 후회마저 일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내노라 하는 장로들도 통상 드리고 있는 십일조 분량의 액수를 드렸고 더욱이 재벌이라는 박 장로도 그 정도했는데 나는 그보다도 몇 갑절이나 되는 귀한 금덩어리를 그것도 무기명으로 내놓았으니 마음이 서운하고 어정쩡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당신께 의논을 하지 못하고 헌금을 했었는데요.” “감사헌금?” “그동안 애들이 주는 용돈과 푼푼이 생기는 돈을 모아서 순금열쇠를 마련했었어요.”

창수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금열쇠를?” “화폐가치는 변동이 심해서 금을 사두었었어요. 오늘 그것을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걸? 그럼 그렇게 하겠다고 나에게 미리 말을 할 것이지 혼자서 그냥 결정을 하다니.”

어쩌면 이렇게도 생각이 꼭 같을 수가 있었을까.

“왜요? 언짢으세요 마음이?” “아니 잘했어요.”

하나님께 바쳤다는데 더군다나 그것도 권사가 그랬다는 걸 장로가 언짢게 생각을 하다니 당치도 않는 말이다. 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다른 뜻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잘했어요. 당신이 모은 돈으로 헌금을 한 걸 내가 뭐라고 하겠소.”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정말이지 잘했다니까요.”

창수는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묘한 심정이었다. 창수가 하나님께 드린 금덩어리도 따지고 보면 아내의 의도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창수는 이 금덩어리를 샀으나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숱한 궁리 끝에 팔뚝만한 모양새 없는 금덩어리를 그대로 양복장 위에다가 얹어놓기로 한 것이다. 창수는 집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식구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손을 올려 금덩어리를 쓰다듬곤 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이 마냥 흐뭇하고 기뻤다. 그리고는 매일 신문에 게재되는 금 시세를 보는 게 취미였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여보 당신 큰 결심을 했구료.”

창수는 자신에게 하고픈 말을 아내에게 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언짢으신 것처럼 그러셨어요?” “뭘 내가 어떻게 했길래?”

시치미를 뗐지만 마음은 한없이 예수님께 송구스럽기만 했다.

“보셨지요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보다도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를 바치신 분이 계시지 않았어요? 그것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기명으로요.”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드렸느냐가 문제겠지.”

창수는 웃었다. 해맑은 가을하늘처럼 얼굴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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