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예레미야를 읽고 묵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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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렘 4:3)고 이스라엘 선지자 예레미야는 외쳤다.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문장은 도치법으로 쓰여 있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필자의 일곱 번째 수필집 표제를 ‘묵은 땅을 갈면서’로 정함도 이런 의미였다. ‘가시덤불이 무성한 묵은 땅’이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오래도록 자기의 영리를 위한 온갖 탐욕의 심리가 아닐까. 이는 허위와 거짓과 불신이 담긴 마음이요, 미움과 멸시를 조장하는 심리이니 이는 악인의 씨앗이다. 시편 1편 5절과 6절을 보면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악인의 길은 망한다”라고 했다. 그러기에 그를 깊이 갈아엎고 그곳에 파종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밭에 생명의 씨앗을 심고 복을 가꾸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뿐인가. 벌레를 잡아내고 무성한 잡초를 뽑아내며 정성껏 물을 주고 거름으로 가꿀 때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

필자는 1960년도 중반기부터 ‘전북일보’ 기자로 일했다. 그 당시 중농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야만 우리나라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었다.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함께 잘살아보세”란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짐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기에 농촌 실정을 취재하려고 그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하루에 세 끼니 밥도 먹지 못하고 두 끼니로 겨우 배고픔을 달랬다. 봄철이 되면 춘궁기인 ‘보릿고개’의 가난이 찾아온다. 그해 농사를 지으려면 부득이 빚을 내야 했고 끼니도 이을 수 있었다. 이같이 핍절한 형편임에도 당시 농촌 아낙네들은 먹지 못해 부황(굶어 살가죽이 누렇게 되는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따뜻이 돌봐 회생시켰다. 만일 그 병으로 죽은 자가 마을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부락민의 수치로 여겼기에 주로 그들의 돌봄은 아낙네들이었다. 

이들의 학벌은 변변치 못했다. 그런데도 따뜻한 마음씨, 성실한 자세는 어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정신세계요, 가치였다. 매일 동이 트면 논밭으로 나가 열심히 일을 한다. 굵은 흙덩이를 잘게 부수고 곱게 다듬어 이랑을 짓고 정성껏 씨앗을 뿌린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거칠어진 마음도 아름답게 다듬어 간다. 그뿐 아니다. 새싹이 자라는 동안 잡초도 함께 자라 곡식의 자양분을 빨아먹기에 부지런히 그것을 뽑아내면서 자기 마음의 잡초도 동시에 제거한다. 또 물과 거름이 부족하면 흡족히 보충해준다. 이처럼 정성을 다할 때 풍작을 이루듯 그들의 성품도 인성도 다듬어진다. 어쩌면 농사는 농민들의 교육현장인지도 모른다. 

‘묵은 땅을 갈라’의 또 다른 의미는 풍성한 내일을 이룩하라는 뜻이다. 계시록 말씀을 보자. 

“천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위의 말씀을 역설적으로 풀이해 보자. 두루마리에 기록된 세 가지 재앙(겔 2:10)을 먹을 때는 고난이 막심하나 이를 극복할 땐 꿀같이 달다. 묵은 땅을 갈 때에도 많은 힘이 드나 풍요의 수확을 이룰 것이니 그 기쁨을 위해 힘써 달라는 의미다. 얼마나 풍요가 흐뭇한 삶을 이루는가.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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