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5)

Google+ LinkedIn Katalk +

‘사업’ 숲 볼 수 있어야… 상호 소통이 중요

도태하는 기업군들 위 성장하는 기업 서 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생존, 살아 남고 커 나가

김 회장을 만난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해 일본 섬유산업의 선진 기술과 정보에 밝았던 그 분은 일본에 지인들이 많아서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 초기에 가장 선구적인 경영을 할 수 있었다. 더욱이 나를 만나기 전 이미 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뒤 섬유업계에서 최고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직물, 염색, 가공 회사들이 신규 생산설비를 들여놓으면 꼭 김 회장을 찾아와 신제품 개발을 논의할 정도였다.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나의 멘토다. 지금도 나는 생전에 김 회장께서 해주신 말씀들을 꺼내어 곱씹어보곤 한다.

“사업이란 숲속의 나무와 같다네.”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 이 말을 듣고 그 뜻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들은 말이기에 기억해뒀을 뿐이었다. 이후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울창한 숲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일을 익혀가고 거래하는 협력회사가 많아지면서 숲의 나무들이 하나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떤 나무는 아름드리 둥치에 잎이 무성한가 하면, 어떤 나무는 줄기는 가늘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햇빛을 못 받고 뿌리를 뻗지 못해 아예 말라 죽어버린 나무도 있었다.

처음에는 같은 크기였던 작은 나무들은 세월이 가면서 차이가 나고, 작은 나무는 큰 나무 그늘에 가려 햇빛을 못 받고 뿌리 영역이 좁아지다가 결국 죽게 된다.

이 평범한 자연의 원리가 기업 세계에서는 실시간마다 벌어지고 있었다. “먹고 살만큼 됐으면 천천히 하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비즈니스 세계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앞서갈 수 없으면 최소한 발을 맞춰갈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 잠깐 뒤처지는 순간 도태된다. 노키아, 모토롤라, 코닥, 소니 같은 기업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당장 앞서가기 위해 꼼수와 속임수를 쓰면 순식간에 소멸한다.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노점상도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신뢰를 쌓고 부단히 변화에 도전하며 뻗어나가야 살아남는 것이 비즈니스다. 기업은 기술과 능력, 신뢰와 신용의 네트워크가 큰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이를 통해 기초가 든든히 다져져야 발전한다. 기업 하나하나가 숲 속의 나무인 것이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러서야 ‘사업은 숲과 같다’는 말의 뜻이 조금 와닿았다. 같은 조건에서 출발해도 어떤 이는 큰 사업을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도태하는 기업군들 위에 성장하는 기업이 서 있다. 운이 좋고 나쁘고의 차원이 아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생존하고,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어야 커나갈 수도 있다.

나무는 뿌리가 흙에서 흡수한 양분을 끌어올려 그것을 모든 가지들로 전달하는 순환계를 가지고 있다. 아름드리 나무는 그 체계가 잘 되어 있어서 크게 자란 반면, 말라 죽은 나무는 어딘가 문제가 있어서 양분이 골고루 공급되지 못했을 것이다. 각 나무의 운명은 결국 나무를 구성한 뿌리와 지체들 간의 ‘소통’에 달린 것이다. 김 회장은 내게 사업도 나무처럼 소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숲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김 회장의 이 가르침은 그 후 평생 동안 나의 사업관이 됐다.

창조, 사람 관계에서 시작된다

처음 동대문시장에 가보고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곳은 완전히 별세계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중추는 경공업이었고, 그중에서도 섬유산업에서 종사하는 근로자가 전체의 40% 이상이었다. 패션 회사들은 물론 서울의 평화시장과 남대문시장, 대구 서문시장, 부산 범일동시장(부산진시장), 광주 충장로시장 등 전국 의류 도소매 시장에 모든 원단을 공급하는 역할을 동대문이 했다.

당시 동대문은 그야말로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었고, 모든 정보와 자본이 몰리는 유통의 중심지였다. 현장에서 직접 느낀 열기는 더 대단했다. 은행들도 자금 조달이 어렵던 그 시기에 제도권 금융 체계에 버금가는 사금융 시장이 형성돼 활발하게 돌아가는 곳이 동대문 광장시장이었다. 은행어음은 물론, 문방구점에서 파는 개인어음도 할인이 돼 원활하게 유통되는 자본시장이 거기에 형성돼 있었다. 

당시 사금융은 지금처럼 악질적이지 않았고, 신용거래 체제를 확립해 상업금융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렇게 운용된 자금 규모는 지금 은행들의 캐피털 자금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 같은 활기 덕분에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6개월이나 일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고단함보다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한 흥분이 더 컸다. 커피 행상도, 꼬치구이 행상도, 심지어 지게꾼, 노점상 자릿세도 변두리 집 한 채 값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여기서 돈을 벌어 강남에 땅을 사서 큰 부자가 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렸다. 그만큼 모든 정보와 돈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동대문 원단시장에 진출한 사람은 신세계로 진입할 기회를 잡은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의 첨단 IT산업 스타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거기서 벌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일만 잘 배우면 창업을 할 수도 있고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돈을 벌고 싶은 것보다도 어서 이 새롭고 매력적인 세계의 구성원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을 담아 나는 동대문의 섬유시장을 ‘동대문 대학’이라고 불렀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