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손양원 목사님 사랑의 원자탄 정신으로 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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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광주동노회 빛과사랑교회 담임목사로 1979년 2월 2일 장년 12명 되는 시골교회에 부임하여 6년간 전도사생활을 했습니다. 1985년 그 교회가 수몰되어 목사안수를 받고 광주광역시로 나와 교인 몇 가정과 이전개척을 시작하여 이동해 다니며 3번의 교회 건축 1번의 증축을 통해 한 교회를 섬겨온 목사로 내년 은퇴를 앞두고 47년을 뒤돌아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목회, 섬김의 목회를 정신적 멘토되시는 순교자 여수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와 학습, 세례, 신학의 길로 인도하시고 교육전도사로 섬겼던 덕양역전교회(현 소라교회) 조영래 목사(은퇴 후 서울에 계심) 배우고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원자탄 정신을 나의 신앙의 모토요 섬김의 목회를 갖게 되었는가를 잠깐 말씀 드리면 1962년 내 나이 7살 때 6호 사는 두메산골에 성탄 새벽송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여 주신 천사들이 계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여수 미평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1950년 9월28일)하시고 난 12년 후 손양원 목사가 시무하는 애양원교회에서 나병을 치료받고 땔감을 때던 시절 애양원에서 지역의 산을 사서 산 관리를 위해 소라면 봉두리 의곡(여수 영락공원 아래 동네)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총각 청년 이 전도사께서 몇 명 안되는 나환자 출신들의 교인들을 동원하여 20리 산을 넘어 새벽송을 통하여 우리집 마당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 세 곡과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군대를 제대하고 두메산골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와 가족을 봉양하려고 하는 큰 형님(후에 이춘기 장로)이 새벽송하는 성도들을 안방에 모셔서 추위를 녹여 드렸고 복음을 받아들여 그 날 1962년 12월 25일 성탄절부터 큰 형님, 형수, 초등생 누나, 어린 내가 20리 산길을 넘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어린 나이로 주일학교 때부터 손양원 목사님의 간증과 순교의 정신을 배우며 애양원교회와 병원, 손양원 목사님의 묘소와 동인이 동신(나의 순천중학교 선배)이 순교의 정신을 보고 사랑의 원자탄정신을 배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말씀이 우리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5남 1녀 저의 형제중 큰 형, 차형, 막내 동생이 장로, 한 명이 집사, 누나가 권사, 내가 목사로 내 아들, 며느리, 사위가 목사, 딸이 전도사(사위와 딸은 총회 파송으로 7년간 선교사 다녀옴) 큰 조카가 김제노회 노회장이었던 김제 백구교회 담임 이종식 목사 사위가 목사, 손자 이성훈 목사 등 우상을 숭배하던 가문에 많은 장로와 목회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사랑의 원자탄은 터지면 기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소재지 덕양으로 이사하여 덕양역전교회(현 소라교회)에서 사랑의 원자탄의 정신을 더욱 확고히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목회는 오래 참고 사랑으로 섬기면 장수목회를 하게 됩니다. 특히 지역사회를 내 목양지처럼 섬기고 지역주민과 노회와 총회, 내 동포들과 해외 선교지의 많은 영혼들을 내가족처럼 예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요 나의 목회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리종기 목사

<빛과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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