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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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우회, 독립운동 위장단체라며 감시 이어져

‘성서조선’ 지식인‧기독교인들 사이에 인기

김 목사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에 대해 그날 이후부터 계속 흐르는 눈물로써 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1939년 10월 말경이었다. 농우회 사건이 터졌다. 당시 의성교회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시절 김철훈, 주기철, 이유택 등 10여 명과 함께 농우회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유지해 왔는데 일본 경찰은 농우회를 독립운동 위장단체라 하며 감시를 계속했다.

김철훈 목사는 출옥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사택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친 후 교인 집에서 예찬을 받고 있는데 경북 의성에서 배만수 형사가 찾아왔다. 김철훈 목사를 농우회 사건의 혐의자로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모를 집 모퉁이로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출두하는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명함을 한 장 주고 사식 차입금을 송금하고 싶으면 이 주소로 하라고 했다.

김철훈 목사의 연행 내력은 이러했다. 의성읍교회에 시무한 유재기 목사가 평신도 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 명과 조직한 농우회를 김철훈이 졸업 후에도 계속 이끌어 왔는데 이것이 독립운동을 위장한 단체였다는 일본 경찰의 조사 내용이었다.

이 농우회 사건의 배후 인물로 당시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연루되어 8월에 이미 체포되었으며, 김철훈 목사를 늦게 연행하러 온 것은 그동안 신사참배 사건으로 평양에서 구류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날 연행되어 간 김철훈 목사는 하룻밤 평양경찰서에서 보낸 후 경북 의성으로 갔다. 의성경찰서 구치소에 수감되던 날 밤 이미 몇 달 전에 잡혀 온 이유택, 송영길 목사로부터 “우리가 다 고백했으니 사실대로 다 털어놓으라”고 말해서 고문을 받지 않았다. 그곳에는 동지와 친우들만 있어 반갑고 편안히 있다가 12월 말에 석방되었다.

의성경찰서에 있는 동안 안국동교회는 김철훈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며 아버지인 김경덕 목사에게 간청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출옥 후 김철훈 목사는 한사코 거절했다. 아직 송산리교회 사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교회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목회 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무렵 국내는 전시체제로 들어가 동원령이 내려져서 사상 불온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동기인 강태국 목사는 김철훈 목사를 만주로 데려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송산리교회 당회에다 사표를 제출했다. 이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안주노회장이 찾아와 안주로 와서 같이 목회하자고 졸라댔다.

때마침 노회로부터도 청빙을 받았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문제의 인물이 자기 관할 구역으로 오면 골치 아프다며 압력을 가하자 노회장인 김화식 목사와 임원들이 모여 이를 걱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삼성리교회 장로들이 찾아와 김철훈 목사가 안고 있는 신변상의 문제들을 고등계 형사한테 이야기해서 잘 해결해 주겠다고 하며 1941년 봄 김철훈 목사를 삼성리교회로 모시고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참 밀리기 시작할 무렵 조선 곳곳에서는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었다. 당시 좌절 속에 빠져 있던 교계에 광야의 소리 같았던 신학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은 비록 무교회주의자들에 의해 편집되긴 했으나 지식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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