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한 발짝만 달리 디뎠어도 오늘의 나는 없다 (1)

Google+ LinkedIn Katalk +

‘오 신실하신 주’ 2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있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이 노래는 나의 인생 고백이요, 내 목회 여정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어느날 교회밥 50년 여정을 더듬어 가며 기도를 하던 중, 소름이 돋았다. 내 인생 여정 한 걸음만 달리 디뎌도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로 신학대학에 가기로 결단했지만, 신학대학이 어디에 있는지 신학대학에는 어떻게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서울에 사시는 이모부님께 편지를 드렸다. ‘신학대학교 입학원서 한 장 사서 보내달라’고. 신학대학 정보에 무지하기는 이모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모부가 아시는 한 가지 사실은 한국교회엔 ‘한경직’이라는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 뿐이었다. 이모부는 무조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다. 운 좋게도(?) 아니 감사하게도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 조카가 신학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데 어찌하면 되느냐고 여쭸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광나루에 가면 ‘장로회신학대학’이 있다고 안내해 주셨단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장신맨으로, 통합맨으로 살게 되는 출발이었다. 한 발자국만 다른 길을 걸었어도, 오늘의 나는 없다. 

장로회신학대학 합격을 하고 진주노회 거창군 시찰 내 사경회가 있어 참석을 하게 되었다. 부흥강사는 고척교회 김제건 목사님이셨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매시간 앞에서 찬송인도를 했다. 마지막 시간, 김제건 목사님께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부르시더니 서울에 오면 고척교회로 오라고 사역 초청을 해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장신대 입학과 동시에 교육전도사가 되어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 부흥 사경회가 없었다면, 내가 가는 길은 달랐을 것이다. 

장로회신학대학 졸업반 여름방학 때 우리는 부여 임규일 목사 고향교회로 농촌 봉사선교를 갔다. 내가 맡은 일은 저녁 시간 텐트를 쳐놓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이었다. 학교 측 지도교수로 참석하셨던 분이 박병달 학생과장이었다. 봉사활동을 마치는 마지막 날, 박병달 과장이 나에게 한남제일교회 중고등부로 와달라고 간곡하게 초대해주어 나는 고척교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원(석사과정) 2년을 한남제일교회에서 섬길 수 있었다. 

나는 공군 장교가 되어 정신교육장교로 대전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주일 아침, 막 100일을 지나는 큰아이 단비가 열이 나 일찌감치 병원에 갔다가 가까이 보이는 대전세광교회 예배에 참석을 했다. 함경보 목사님은 낯선 제복의 청년을 보자 손을 잡고 사택으로 끌고 들어가 점심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기독교 교육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당시, 교단 내 10명도 안 되는 교육전공자임을 아시고 바로 그다음 주일부터 세광교회 아동부와 청년부를 맡겨주셨다. 우리 단비 감기만 안 걸렸어도,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군장교 전역과 함께 나는 신대원 2학년에 복학을 하게 되어 서울로 와야 했다. 함경보 목사님은 나를 서울로 보내며 내 앞에서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님께 전화를 하셨다. 여기 박종순 목사님 청년 시절을 보는듯한 한 놈이 있으니 무조건 사역자로 받으라는 강권적 추천이었다. 박 목사님은 껄껄 웃으시며 “형님이 받으라면 받아야지요” 하셨다. 이것이 충신교회 사역의 시작이었다. 지나온 걸음 걸음 돌아보니 소름이 돋는다. (2편에서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