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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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더불어 함께 가는 따뜻한 인간적 관계

패션 원단 신상품 만들어내는 것 사업의 핵심, 

유행할 패션 트렌드 먼저 파악하고 생산 준비

1970년대 초반, 동대문시장은 하나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전까지 동대문시장에서 유통되는 품목은 주로 포플린, 광목, 양단, 실크 등이 전부였고, 시장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같은 화학섬유나 T/C 혼방섬유, 고급 모직 원단 등을 제직, 가공, 염색하는 신기술이 들어오면서 첨단 설비들을 갖춘 공장들이 세워졌다. 그 바람에 시장 규모가 갑자기 커지고 유통량이 열 배, 백 배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청과물, 생선, 잡화를 팔던 시장들이 전부 직물 시장으로 바뀌었다. 그러고도 공간이 부족해 지금의 동대문 종합시장 건물이 신축되기도 했다.

이때 동대문 광장시장을 주도한 것은 바로 산업 변화와 정보에 앞서간 엘리트들이었고, 그 중심에 김교석 회장이 있었다. 일본 섬유업계와 교류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정보와 지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고, 한국 시장에 맞게 사업에 적용시켰다. 요즘 말로 ‘창조 경영’을 한 셈이다. 정부가 해외차관을 통해 경공업을 지원해 준 흐름과도 맞물려 1년에 계열사가 몇 개씩 창업되고 확장돼 갔다. 김 회장은 새로운 직조기술이나 가공기술 설비가 들어올 때마다 전문 계열사를 하나씩 만들어서 믿을 만한 이들에게 맡겨 경영했는데, 내가 맡은 메트로 상사도 그중 하나였다.

메트로 상사는 고급 패션 회사가 의류를 만들 때 사용하는 고급 원단 소재의 직물 개발과 생산에 집중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패션 원단 신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해에 유행할 패션 트렌드를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는 생산 준비를 해야 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신기술을 활용해 신상품을 개발, 생산하는 일도 계속했다. 개발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마케팅도 어려웠다.

처음 점포 하나를 맡았을 때는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도매상들을 상대하는 것과 공장에 주문을 넣고 거래하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자 드디어 김 회장은 내게 제품 개발을 맡겼다.

섬유업은 공정이 여러 단계인 복잡한 작업이다. 수십여 가지 공정을 환히 꿰뚫고 있어야 제대로 된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 그 모든 과정을 나는 순전히 현장에서 배웠다. 업계의 최고 실력자인 김 회장이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원사를 뽑는 데서부터 직조, 제직, 염색, 날염, 후가공 등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공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가르쳐준 덕분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그 모든 것을 자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분이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도 볼 수 있었다.

“창조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발전되는 것이다.”

김 회장이 가르쳐준 비즈니스의 세계란 살아 숨쉬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그 덕분에 나는 사업이 오직 이윤을 추구하며 손익계산만 하는 차가운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서 함께 가는 따뜻한 인간적 관계라는 것을 일찍 배울 수 있었다.

존중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훈련 

회장과 계열사 직원의 관계였지만, 그분과 나 사이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나이나 상하 위계가 문제되지 않는 진실한 수평관계가 이루어졌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질문하고 아이디어가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드렸다.

그때는 흔치 않았던 일제 닛산 ‘닷도산’ 승용차로 함께 출장을 다녔다. 외제 승용차가 흔치 않을 때여서 의정부 신성통상 공장에 갈 때나 한강 다리를 건너 방림방적으로 갈 때면 헌병 초소에서 경례를 붙이곤 했다. 이렇게 이동하는 시간은 내게는 ‘동대문 대학’의 강의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앞자리 조수석에 탔는데 나중에는 뒷자리에 김 회장님과 나란히 앉아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런 영향으로 나는 공장이나 실험실, 조색 가공실 등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도 스스럼없이 질문을 하곤 했다. 이런 질문은 그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김 회장과 승용차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 중 상당수는 업계에서는 최신 정보에 해당하는 내용들이었다. 때문에 내가 현장에서 질문을 하면 상대방에게도 정보가 제공되는 셈이었다. 신상품 개발에 관한 좋은 정보가 있으면 서로 적극적으로 교환하기도 했다. 양쪽에 다 유익이 되는 관계였다.

당시에는 유럽이나 일본의 기계, 염료, 화학 회사들이 한국 시장 개척을 위하여 개최하는 마케팅 설명회가 많았다. 주로 호텔에서 열리는 이런 행사마다 나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제일 질문을 많이 했다. 나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질문을 도맡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라도 더 배우고 알고 싶은 호기심이 항상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공장과 실험실, 기계실에서 듣고 보고 배운 지식들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알고 싶어할 만한 질문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질문들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이런 질문들이 참석한 분들이나 설명하는 쪽 모두에게 도움이 됐기 때문에 나는 인기가 많았다. 새로운 거래처에 가서 인사를 할 때면 “그때 질문하던 분이로군요!”라는 말을 듣는 일도 많았다. 좋은 첫인상 덕분에 거래가 수월해지기도 했다. 몇몇 회사에서는 출입금지 구역인 생산 현장, 실험실이나 연구실에까지 자연스럽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김 회장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됐다. 외국회사의 설명회 등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정리해서 보고하면 김 회장은 늘 재미있게 들어줬다. 질문할 것도 미리 준비해 갔다가 질문하면 그분의 경험과 식견을 담아 답변해주곤 하셨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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