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인도네시아에서 강압적 선교한 칼뱅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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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복음 전하는 게 선교의 본질

선교사나 목사나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명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뭘까?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그런데 설교 강단에서 개인기를 앞세운 농담을 코미디언처럼 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자기 논지와 주장을 내세우고, 자랑을 일삼으며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많다. 이런 타락한 강단에 물든 한국교회가 인도네시아에서 선교하는 모습은 인도네시아에서 서구 기독교가 현지인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감을 망각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나 서구 기독교 국가가 선교 베이스캠프를 만들었지만, 모두 철수하고 한국 선교사들이 물려받은 상황에서 여전히 열강의 변질된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세상의 방법을 당장 내려놓고 예수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인도네시아 선교의 핵심이다.

교회가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근본 목적과는 달리, 1811년에는 영국이 개입하여 프랑스의 세력이 약화하면서 영국은 과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담당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네덜란드의 반격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화란 교회의 공격적인 선교가 계속되었다. 1830년부터는 인도네시아의 자원에 대한 착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자바의 전 지역을 관할하고 인도네시아인들을 마음대로 통제하였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를 등에 업고 서구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강압적인 선교의 결과로 기독교는 네덜란드 상선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상륙하였는데, 화란개혁교회의 칼뱅주의가 강한 선교지이지만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칼뱅주의 장로교의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식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포르투갈 시대에서 네덜란드 식민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인도네시아 선교의 분야도 같은 양상을 띠었다. 정부가 다른 나라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잘 내주지 않거나 내주어도 경제·정치적 요충지는 거의 내주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선교사들만 그런 곳에서 선교할 수 있었다. 선교는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주관되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가 주도하는 기독교에 실망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꿈꾸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한 인도네시아의 노력은 3세기 넘도록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은 무산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처음으로 항쟁에 승리하여 활약한 영웅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자바 전쟁(1825-1830)에서 활약한 디뽀네고로(Diponegoro) 왕자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인도네시아 선교는 계속된 복음과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와 갈등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을 강조하다 보면 늘 공격적이란 누명을 쓰게 되고, 문화에 적합하게 전하려 하면 문화로부터의 부정적인 면도 수용이 불가피했다. 네덜란드인 선교사가 이슬람식으로 여러 아내와 살면서 이슬람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극단적인 사례도 많았다. 이런 일이 불륜의 소문으로 퍼지자 여러 아내를 가진 자를 교회에서 사역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사람도 회개의 세례를 받게 하면서도, 교회 중직을 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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