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의 정기 구독자였다는 혐의로 투옥
아버지 70세 고령, 일제 미국 첩자 혐의로 체포
편집인이 6명의 동호인으로 시작했으나 훗날엔 김교신이 단독으로 펴낸 개인잡지가 되었다. 1942년 3월, 제158호가 나오자 신경이 날카로웠던 총독부가 수필문에 나오는 기사를 꼬투리 잡아 ‘성서조선’을 폐간시킬 음모를 꾸몄다.
당시 ‘성서조선’은 계간지로 300명 가량의 고정 독자가 있었는데 이들의 명단이 잡지사에 비치된 관계로 이들을 전부 불러서 조사했다. 이들 중 사상적으로 과거 전과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 이 사건에 연루자로 가두었다. 김철훈 목사도 구독자였는데 과거 몇 차례 사상 불온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었으므로 제1차로 지목되었다.
교회 장로들은 당회장 목사가 구금되자 손을 써서 몇 달 후 풀려났다. 늦은 가을 11월 초순이었다. 두 형사가 다시 찾아와 집안 책들을 조사하고 김철훈 목사를 다시 연행했다. 그해 안으로 사건을 종료한다더니 다음해 3월이 되어도 전혀 소식이 없었다. 당시는 식량과 물자가 귀했던 때인지라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이때 김철훈 목사 사모는 어린 딸을 업고 선교리경찰서 고등계 주임을 만나 병보석을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김철훈 목사의 부친 김경덕 목사는 당시 양평읍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다. 김경덕 목사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잡혀가 이듬해 3월 30일에 석방되었는데 죄목은 그들이 멋대로 붙인 것이지만 미국 정부의 첩자라는 혐의였다. 평소 김경덕 목사가 미국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냈으니 그것이 이유가 된 것이었다.
이 무렵 아들 김철훈 목사가 ‘성서조선’ 사건으로 또 잡혀가 있었다. 이것은 그가 ‘성서조선’의 집필자가 아니라 정기 구독자였다는 혐의였다. 그래서 김철훈 목사는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처럼 남북에서 릴레이식으로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했다.
일본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내 요시찰인물에게 옥쇄를 조였다. 1943년 12월 1일, 아버지는 70세의 고령이었으나 일제는 다시 그를 미국의 첩자 혐의로 체포했다. 김경덕 목사는 추운 감옥에서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2월 말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 9개월이 지난 1945년 1월 1일 소천하셨다는 소식은 아들 김철훈 목사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토록 염원한 자유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었다.
해방의 기쁨은 누구보다 김철훈 목사에게 각별했다. 잔악한 일제로부터 무수한 세월을 감시와 투옥과 고문을 받았기에 해방은 이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현실 그것이었다. 삼성리교회 교우들과 동리 사람들은 매일 예배당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하루는 김철훈 목사가 부인에게 평양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훌쩍 떠났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고당 조만식 장로가 위원장으로 있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이었다. 고당 조만식은 김철훈 목사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자기의 일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고당은 김철훈 목사에게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생필품을 정리하고 재고 등을 확인하는 일들을 맡겼다. 얼마 후 그는 남한에다 북한의 어려운 실정이 담긴 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맡겼다. 김철훈 목사는 지프차를 타고 38선에서 내려 걸어서 서울에 갔다. 조선호텔에 있는 이승만 박사를 만날 수 없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선생을 만나 그 문서를 전했다. 여운형 선생은 김철훈 목사 부친의 친구로, 아버지 이름을 대고 만났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