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한 발짝만 달리 디뎠어도 오늘의 나는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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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교회를 섬겨온 목회 여정에서 이력서, 자기소개서, 추천서를 내고 섬길 교회를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요즘 우리 교역자들이 청빙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함경보 목사님의 전화 한 통화로 충신교회에서 신학대학원 시절을 아동부 그리고 청년 대학부를 섬기며 목회를 배울 수 있었다. 이 기간은 목회학적으로 내 인생에서 참 중요한 시간이었다. 학교에서는 신학과 목회의 원리를 교회에서는 목회의 영성과 실천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바른신학 균형목회」라는 원리를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님이셨다. 총회를 아끼고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론을 배운 곳도 바로 이곳 충신교회였다. 이 무렵 나는 신학대학원 졸업반 회장으로 섬기며 380명 동료들을 각 교회로 파송하는 너무나 소중한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380명 모든 동료를 각 교회로 파송하고 나니 정작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섬기던 충신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섬기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 어느 주일 아동부 예배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망원제일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망원제일교회는 내가 성자로 부르는 이상양 전도사님이 시작한 교회이다. 전도사님이 별세하고 김기복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다가 부산으로 떠나신 후 잠시 교회가 큰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임을 찾느라 매 주일 다른 목사님이 소위 선보는 설교를 하시고 당회, 제직회가 모여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 주일 오셔서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는 분이 갑작스런 사유로 못 오시게 되었단다. 갑자기 주일 11시 설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택시를 타고 달려가 주일 예배를 했는데 시편 42편으로 설교를 하게 된 그날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교회 사무실에서 권사님들이 차려준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장로님들이 들어오셨다. 그 사이 당회, 제직회가 나를 담임으로 청빙하기로 결의를 했단다. 번갯불에 콩을 구워도 이리 빨리 구워질까? 전쟁이 나서 피난길을 떠나도 이리 빨리 이사를 할 수 있을까? 이리하여 나는 부목사도 전임전도사도 해보지 못하고 망원제일교회 담임 전도사가 되었다. 

첫 목회지 망원제일교회는 내 목회의 첫사랑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처음 해보는 사역인지라 신기하기도 했고 신나기도 했다. 심방도, 장례 예식도, 결혼 주례도, 병든 자 안수도, 전도 잔치도, 축도도, 세례 집례도, 성찬 성례전도… 모두가 처음이었다. 너무 재미있고 신이 나 생명조차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망원동, 마포 일대가 들썩들썩할 만큼 참 야단스럽게 목회를 했다.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고 귀신이 떠나고 병든 자가 낫고 새가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돌이켜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었고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으면 내 인생, 내 목회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게 분명한 확신 한 가지가 있다. 목사의 인사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 어느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손길 아닌 것이 없다. 한 발짝만 달리 디뎠어도 오늘의 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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