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전도자에게서 받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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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길거리에서 전도자 한 분을 만났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내게 인사를 하며 “교회 다니십니까?” “예” 대답했더니 “복 받으신 분이십니다. 교회 직분을 물어봐도 될까요?”하기에 “믿음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평신도인 줄 알고 두란노서원에서 발행한 전도지 ‘최고의 행복’을 내게 주며 “읽어 보십시오. 믿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직분을 믿음이라고도 한다. 

그 전도인은 퍽 다정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저 정도라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대화 내용을 봐도 그렇다. “교회에 다니십니까?” 하기에 “예”라고 했을 때 “그래요?”라고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굳이 “복 받으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함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의 복을 받는다]라는 ‘전도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다. 또 “직분을 물어봐도 될까요?”라는 말도 그렇다. “교회 직분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어도 충분한데 “물어봐도 될까요?”라고 했다. 이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니 예의 면에도 부족함이 없다.

전도지 표제처럼 최고의 행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물론 ‘주관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대화 속에서 [사랑의 의미가 풍성히 담길 때 이루어진 감정을 말함]이다.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고 여건을 잘 갖췄다 할지라도 대화 내용이 상막하면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와 불쾌가 이루어져 심하면 죽음에 이른다. 이런 심리를 어찌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은 어떠한 상태를 의미할까? 숨이 끊어진 상태일 뿐일까.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일상을 상실했기에 인생의 가치가 전혀 없을 때를 가리켜 죽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삶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느니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3~4)

“영혼을 소생시킨다”함은 무슨 뜻일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의 죄악된 삶이기에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이를 소생시킨다는 뜻이다. 만일 소생시키지 아니하면 육체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시체뿐이다. 하나님은 영혼과 육체를 결합시켜 완전한 인격을 형성해 주신다. 인간 창조 원리도 여기에 있다. 또 4절을 보자.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의 ‘내가’는 바로 육체를 가리킨다. 다시 3~4절 말씀을 통합해 보자. 영혼과 육체는 인생의 가치를 최상으로 형성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기에 그분의 섭리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길거리에서 만난 전도자를 통해 믿음을 생각해 봤다. 믿음은 생명을 바치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참배를 거절하기 위해 목숨을 바침은 믿음 때문이다. 생명보다 귀한 믿음은 영원한 가치가 주어지기에 그렇다. 이처럼 보배로운 ‘믿음’이기에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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