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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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신사참배 명령, 학생들 주저앉아 울음 터트려

대성통곡하던 어느 교사

이러한 기류에 접한 신흥학교 교사인 유병민, 문병무, 조종환, 고경진 등이 앞장서서 준비에 임하였으며, 드디어 3월 13일 전주 장날이 다가오자 몇 날 동안 밤을 새우면서 만들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처소가마니에 싣고 장터로 나와 학생, 시민,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 태극기는 거사 직전 시장의 통로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시장을 향해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되었다. 12시 20분경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남·여 학생 및 천도교도와 일반인 등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남문밖 시장 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현 완산 초등교) 교정 부근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시장에 들어와 격분을 하며 구보로 행진하여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전주 장날에 일어났던 만세운동은 두 남·여 학교 교사 및 학생들에 의해서 주동이 되었으며, 이날 시위는 밤 11시까지 계속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경찰은 당황한 나머지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총칼을 휘두르면서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학생, 시민, 교인들은 더 열심히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14 일 오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날은 1천여 명이 모여 독립을 부르짖었는데 그렇게 이틀 동안에 4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는데 이 중 김경신은 심한 고문으로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김병학, 이기곤, 김점쇠 등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감 후 곧 사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전여학교에서도 일어났으며, 이들도 남학생 못지않게 애국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였다.

이 일로 전주 서문밖교회의 김인전 목사도 전주 지방 3.1운동 주모자로 낙인이 찍혀 수배를 받기도 하였지만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전주를 탈출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3·1운동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제는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권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그 동안 미션 학교에 대해서 차별을 가했지만 지정학교 제도가 생기면서 호남에 있는 남·여 10개 학교 중 남학교로 전주 신흥학교, 여학교로 광주 수피아여학교가 선정되었다. 1923년에는 총독부의 지정으로 남·여 학교는 공립학교 학생과 같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시설이 미비하자 1925년 위인사, 변요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모금운동을 펼쳐 많은 기금을 갖고 돌아왔다. 이러한 일로 1928년 3층 벽돌로 된 475평의 건물을 완성하여 봉헌식을 갖고 미션학교로서 그 위상을 더 욱 굳게 자리잡아 갔다.

신사참배 반대와 인돈 선교사

1930년 여보솔 선교사의 교장직 사임으로 인해 제5대 교장으로 린턴(W. A. Linton, 한국명: 인돈, 이하 인돈으로 표기)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인돈 선교사는 신흥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시무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호남 지방 10개 미션학교에 밀려오고 있었으며, 이때 10개 남·여 미션학교도 스스로 폐교함으로 일제 천황제에 전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드디어 9월 6일 아침이 되었다. 이날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다가공원에 있는 전주신사(현 충혼탑 자리)로 강제 인솔하였다. 이에 앞서 인돈 교장에게 찾아가서 “학생들은 황국신민인데 당신은 미국인이 아니오. 황국신민이 의무를 행하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막으시오?”하고 위협을 하였다. 이날 아침 신사참배를 하기 위하여 강제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인돈 교장은 눈물을 흘렸다. 전주신사에 강제로 인솔되어 온 학생들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학교가 계속되기를 희망했던 학생들은 폐교냐, 계속이냐의 문제가 달린 이날 아침의 신사참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신사참배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날 전주신사 앞에 선 신흥학교 학생들과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일본 경찰의 호령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우뚝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으며,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놀란 일제는 곧 두 남·여 학교를 비롯해서 호남 지역에 있는 미션학교를 폐교시키려고 준비하였다. 이때 지역 교회와 지역민들은 계속 학교가 지속되기를 바랐으나, 인돈 선교사를 비롯해서 미국 남장로교 학사운영위원회가 모여 폐교를 결정하였다. 이때 기전여학교 재학생들은 시내 공립학교로 전학을 하였으며, 신흥학교 학생들은 1937년 9월 22일 일본인 마스도미 장로가 설립한 고창 읍내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그 곳에서 졸업을 하였다.

폐교 당시 교장을 맡았던 인돈 선교사도 정든 학생과 교정을 떠나야 하는 아픔과 비통함을 느꼈다. 더욱이 자신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학교가 폐교된 일에 대해 일생 동안 호남인들에게 죄책감을 가졌다고 한다.

다행히 신흥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 일부는 고창 고보로 옮겨졌고, 모든 서류는 도청 학무과에 보관되었다. 학교 건물은 저금관리국 훈련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인돈 교장이 미국을 왕래하면서 가져온 각종 과학재 및 비품도 새로 출발하는 순창 농업학교에서 가져갔고, 뛰어놀던 운동장은 이웃 아주머니들의 배추 및 무밭으로 전락하였다.

인돈 선교사의 재입국과 

전주 신흥학교

피와 땀을 쏟아가며 성장하던 신흥학교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자, 인돈 교장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허공만 쳐다보며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고창고보로 전근을 간 몇 명의 교사가 있었지만, 그들은 고창고보에서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를 한다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하였다. 이때 그들은 전주경찰서 서장에게서 출국 명령을 받게 되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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