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견제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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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하는 동안 내내 힘들게 하던 장로님이 은퇴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내심 이젠 좀 평안해지려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후배 장로님들에게 의식 교육을 시키십니다. “장로는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게 아니야. 목사를 견제하는 게 장로의 할 일이야.”

정말 일까요? 장로는 목사를 견제하라고 세우신 직인가요? 견제라는 말이 나오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한 번은 안수집사회 모임에 갔더니 나이 드신 집사님들이 젊은 집사님들에게 그럽니다. “안수집사회는 왜 있는가 하면 당회를 견제하라고 있는 겁니다. 당회가 제대로 길을 가는지, 바른 결정을 하는지, 맘대로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게 안수집사회의 일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뭐가 올라옵니다. 그래서 그랬죠. 장로는 왜 있는 거며, 안수집사는 왜 있는 건지 아느냐고. 성경 어디에 안수집사는 장로를 견제하라고 되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곤 이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6)

교회, 우리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순종하고, 서로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까지는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삐죽이 고개를 드는 이들은 믿음 공동체에서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 교회 공동체의 리더로 세우신 목사를 도와야 하고, 장로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는 목사를 견제해도 된다? 견제하란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로의 부족을 보완해 주고, 기도해 주고, 밀어주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고만 있을 뿐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장로님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왜 목사님은 주일에 주방에 들어가서 설거지 안 하느냐는 거였습니다. 설거지로 섬김의 본을 보여야 교인들이 존경하고 따를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을 만나서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 정말 죄송하지만 난 설거지하러 주방에 들어가면 도리어 폐만 끼쳐요.” 그러면서 웃으며 그랬습니다. “우리 엄마가 어릴 적부터 날 가르치기를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해서 지금까지 안 들어가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웃으십니다. 좀 거시기 하지만 이해가 된 거죠. 

목사와 장로, 장로와 목사, 아니 모든 성도들은 서로의 부족을 까발리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보살펴 주고 지켜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왜 새삼스레 상대방의 허물이, 죄가 보이는 걸까요? 내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견제는 정치판에서 하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견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격려하여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도록 서로 세워줘야 합니다.

양의섭 목사

<왕십리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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