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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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선도한 완제품 의류 판매율, 업계 최고 성과

최초로 백화점 세일 행사 때 원단 코너 만들어

든든한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소년같이 행복

내 아이디어를 스스럼없이 말씀드리는 단계가 되자, 점차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나는 점점 상품 개발의 중요한 부분까지 맡게 됐고, 내 선에서 거래계약도 전결로 처리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단순한 가르침을 넘어 ‘코칭’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김 회장과 나는 어느새 눈빛만 봐도 통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이가 됐고, 수평적으로 아이디어를 주고받다가 서로의 생각을 상호보완해 신상품을 개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를 던져주면 열 개를 만들어갔던 나의 노력도 작용했지만, 내 의견을 자극제로 삼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한 김 회장의 열린 사고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교감이 빚어낸 결과는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를 냈고,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상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발한 신상품의 성공률이 높아지자 사업 확장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우리 원단을 사용해 생산한 브랜드의 옷들은 늘 시장을 선도했고 완제품 의류 판매율이 업계 최고를 달렸다. 남대문 대도시장, 평화시장에서는 우리 물건을 사려고 우리 영업직원들에게 접대를 하기도 했다. 물량이 커지자 현금 유통도 좋아졌다. 자연히 나는 영업보다는 상품개발에 점차 집중하게 됐다. 좋은 상품이 나오면 파는 것은 문제가 안 됐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대담한 시도를 많이 했다. 앞에서 설명한, 동대문시장 직영매장에서 한겨울에 만국기를 걸고 여름 상품을 바겐세일한 것도 우리가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신세계백화점 세일 행사 때 원단 코너를 운영한 것도, 롯데백화점에 원단 코너를 만든 것도 우리 회사가 처음이었다. 이제는 관행이 됐지만, 패션모델에게 의상을 입혀 찍은 사진으로 샘플북을 제작해 거래처에 배포하는 것도 그 당시 우리 회사가 맨 처음 시도해서 자리매김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어수룩한 점이 많은 새내기 경영자였지만 기발한 생각을 많이 해냈고 뚝심있게 밀어붙였던 것 같다. 언제든 찾아가 의견을 구할 수 있는 든든한 언덕, 김 회장님이 있었기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그분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 내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려주셨다. 때문에 그분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든 시작해야 했고, 늘 이번에 뵈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와 대화할 때 빛나던 김 회장님의 눈빛이 그립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만큼 키가 자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성장한 나였기에, 그런 관계를 경험한 것은 내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큰 나무와도 같았던 김 회장님의 그늘 아래서 보낸 13년 동안 나는 행복했다. 전쟁터 같은 비즈니스의 세계에 맨몸으로 뛰어들었지만 부대끼고 상처받기보다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따뜻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모두 김 회장님 덕분이다. 그 영향으로 나도 사업상 만난 사람들과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평적 교제를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능력이 생겼다. 또한 서로 존중하는 것이 비즈니스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몸소 터득했다. 그때 익숙해진 습관으로 지금도 교계와 정계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만난 많은 이들과 좋은 관계로 살아가면서 그들과 수평적이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제를 해나가고 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요 14:18)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처럼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 힘을 주는 격려가 되었다. 아무 기댈 데 없이 혈혈단신 맨주먹으로 살고 있는 줄 알았지만, 돌아보면 나는 고아가 아니라 든든한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소년처럼 천진난만했고 행복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내가 누린 최고의 복이다.

모험과 도전이 즐거운 이유 

내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한창 일하던 때를 돌아보며 ‘참 좋은 사업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은, 그것이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단 사업은 조금만 방심해도 바로 뒤처지고 존재도 없이 사라질 만큼 실시간으로 변화가 커서 위험 부담이 큰 업종이다. 성공 확률도 대단히 적다. 1970년대 한국의 경공업 비중과 현재의 비중을 비교해보거나, 당시 한국 경제를 주도하던 섬유‧봉제 산업이 현재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법인세를 많이 낸 순서로 10위 안에 들던 섬유회사들이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성경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마 25:14~30)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돈을 땅에 묻어놓지 않고 밖에 나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어온 종의 행동을 칭찬하셨다. 종이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었는지, 평소에 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지, 그런 것들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더 버는 일은 ‘모험’이었다는 것이다.

모험을 하지 않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그래도 묻어 놓았던 종은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질책을 받는다. 주인이 원한 것은 종이 나가서 모험을 하고 이를 통해 성취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은 매일매일 모험하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었다. 40년 사업하는 동안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것이 내게는 두려움이 아니고 즐거움이었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국내 굴지의 방직회사인 방림방적에서 호출이 왔다. 당시 방림방적의 생산품은 90%가 수출용이었고 내수용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은 당시 상공부 방침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 10%의 내수 상품은 우리와 독점계약이 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방림방적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래처였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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