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세상
1941년 9월, 오곡이 한창 무르익어 가던 가을에 나는 경주 김씨 가문의 귀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별 탈 없이 자라던 내게 뜻하지 않은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나이 열 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월 25일,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전쟁이 일어났다. 북조선 인민공화국 군인들이 남침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나는 그 해 일어났던 무서운 광경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으로 기억된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던 그 날은 부모님의 생명과 우리 집 전 재산이 폭격에 의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비극의 날이었다.
“선태야, 아침 식사하자”고 하시던 어머님의 자상하신 음성이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평소 말씀이 없으시던 아버님은 어린 내가 걱정이 되셨던지 식사하면서 타이르셨다.
“선태야, 공습이 점점 심해지는데 몸조심해라. 지금은 전쟁 중이니 돌아다니지 말고 항상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침 식사를 한 후 곧장 옆집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이렇게 신당동 집을 나선 것이 부모님과 영영 이별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던 것 같다.
그 날의 운명을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마다하랴.
친구들과 놀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달려와 보니 우리 집이 몽땅 없어진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무서운 공포심이 순식간에 나의 온몸을 사로잡았다. “엄마! 아빠!”를 목이 메도록 부르면서 온 동네를 쏘다녔지만 부모님을 찾지 못했다.
갑자기 나는 천애 고아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외동아들이었던 나는 그나마 친척조차도 별로 없었던 터라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웃집도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서울은 불바다를 이룬 판국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처참한 상황이었다. 당장 배도 고프고 살 길이 막막했다.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구걸하기 위해 서울 신당동에서 왕십리까지 걸었다. 생전 처음으로 “밥 좀 주세요” 하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용케 음식을 얻어먹었지만 남의 동정을 받아 눈물 섞인 밥을 먹는 내 신세가 한없이 처량하고 슬펐다.
밤이 되자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몰랐다. 무더운 여름 밤 모기떼에게 사정없이 뜯기면서 신당동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첫날밤을 지샜다.
거지 행각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8월 어느 날, 나와 함께 뛰놀던 어린 친구들 여덟 명과 참외, 수박 서리를 하기 위해 뚝섬 쪽으로 원정을 가게 되었다. “야, 우리 수박 서리하러 뚝섬으로 나가자!” “그래, 그런데 주인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려구!” “전쟁통에 무슨 주인이 있겠니. 따먹는 사람이 임자니까 걱정말고 따라와.” “응.”
우리들은 과일밭에서 과일들을 정신없이 따먹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친구들이 뭔가를 호기심 있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 하고 터지는 굉음과 함께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얘야, 너는 천만 다행이구나. 네 친구들은 수류탄이 터질 때 다 죽었는데 너만 살아 남았다. 하늘이 너를 도우셨구나!”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조금 전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높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 흐르는 한강과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수류탄이 터지는 순간 양쪽 눈에 상처를 입는 바람에 실명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운명은 더 비참한 생존 현장으로 나를 몰아넣고 말았다.
나는 살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차라리 그때 그 친구들과 함께 죽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텐데’ 하고 가끔 생각했다.
나에게 닥친 이 가혹한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이 어린 철부지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삶의 절박함 때문에 나는 훗날 철학 공부를 하게 된 것 같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전쟁은 왜 일어나야 하는가?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실명해야 했고 어떻게 불행을 극복해 가야만 하는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모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서 결론을 내리고 행동해야 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