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⑦

Google+ LinkedIn Katalk +

‘주님의 양 돌보는 것’ 사명 깨닫고 정치 관심 끊어

기도로 살아와 한시도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분

문서 속에는 조만식 선생의 서신이 들어 있었는데 김철훈 목사에게 나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는 내용도 있었으나 김철훈 목사는 목사이므로 정치는 못한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평양에 와보니 사무실도 없어지고 조만식 장로도 어디로 잡혀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철훈 목사는 해방 후 이처럼 잠시 타의에 의하여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하나님의 종은 역시 목장에서 주님의 양을 돌보는 것이 사명임을 깨닫고 그 후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김철훈 목사는 노회가 열리는 평양으로 갔다. 해방 후 처음 열리는 노회인지라 각지에서 모인 총대들의 얼굴엔 기쁨과 수심이 교차했다. 낯익은 교역자가 보이지 않았고 노회가 옛날과는 달리 차가운 분위기였다. 참석자들의 얼굴엔 시국을 염려하는 빛이 역력했다. 김철훈 목사는 이번이 마지막 노회 참석으로 생각하고 안면 있는 목사, 장로들을 만나 월남한다는 말을 하였다.

김철훈 목사는 노회 총대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담하고 있는 중 송산리교회 장로들을 만나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들은 김철훈 목사에게 다시 자신들의 교회로 오시기를 요청했으나 김철훈 목사는 월남하므로 그곳에 갈 수 없다고 양해시키고 노회가 끝나기 전에 귀가했다. 오는 도중에 뒤에서 헐떡이며 쫓아온 동평양교회 김인규 장로와 연로한 허섭 목사를 노상에서 만났다.

“우리는 노회에 가면 목사님을 만날 줄 알고 갔는데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저희 동평양교회는 지금 황은균 목사 후임으로 일곱 후보자를 선임했으나 적임자가 없어 고민하던 중 목사님을 청빙하기로 최후 결정하고 오늘 노회로 달려온 것입니다. 김철훈 목사님, 제발 저희의 청빙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 정중하게 청빙에 응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를 허락하고 귀가했다. 다시스로 가려던 요나를 니느웨로 가게 하나님은 역사하신 것일까? 이남으로 가기 위해 꾸려놓은 이삿짐이 평양으로 되돌아갈 줄이야….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1945년 11월 초에 김철훈 목사는 동평양교회로 부임했다. 800여 명 교인의 대교회를 맡고 보니 시골 삼성리교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교육적으로, 재정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김철훈 목사는 어릴 때부터 기도로 살아온 분이며 기도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기도로써 교회에 불을 붙여갔다. 새벽기도는 최적의 기회였다.

목회가 순조로우면서 해가 바뀌자 3·1절 사건이 터졌다. 이때 교회를 보는 공산당의 시선이 달라졌다. 연행과 납치가 일어나 교역자들에게 예언자적인 설교가 원망스러워질 만큼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감시망이 북한 전역에 뻗쳐서 자칫하면 반동이라는 누명을 쓰고 불시에 잡혀갔다.

그는 ‘이북 5도 연합 노회’ 서기로 일했으며, 1946년 11월 3일 북조선 총선거 보이콧으로 공산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1947년 강양욱은 목사들로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하고, 박상순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김익두, 김응순 목사 등을 포섭했다. 이어서 강양욱은 ‘이북 5도 연합 노회’ 목사들을 설득해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게 하여 남한 정부를 부인하고 북조선을 지지하도록 김일성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