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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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고난 동참… 인돈 선교사의 한국인 관심 남달라

그러면 왜 인돈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에게 출국 명령을 시켰는지 먼저 인돈 선교사의 삶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인돈(1891~1960) 선교사는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조지아 테크놀로지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엔지니어 평신도 선교사로 군산에 부임하였다. 비록 기술 선교사였지만 당시 군산 영명학교는 농어촌 출신 학생들이 많아 이들에게 기술교육을 가르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늘 교사 자격증을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콜롬비아대학 교육학부에 편입하여 1921년 교육학 석사를 취득하고 다시 한국 군산선교부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뉴욕에 있는 뉴욕 비블리컬신학교에 다니면서 성서를 체계적으로 배우기도 하였다.

그가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지정학교 제도를 법률로 정하면서 미션학교 육성에 제한을 가하였다. 이때 남학교로서 전주 신흥학교를 지정학교로 선정하자, 교육의 내실화를 기한다면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인돈 선교사를 교장으로 영입하였다. 그러나 미션학교의 교장으로서 신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생을 지도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인돈 교장은 1928년 일시 귀국하여 2년간 콜롬비아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0년에 귀국하였다.

그가 전주에 부임할 무렵에는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이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그 후유증은 호남 지방에 있는 모든 미션 학교에 남아 있었다. 더욱이 신흥학교 고등과에 재학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가장 극심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도 일본인의 메이지절을 맞이하자 그만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보 학생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충돌이 민족 감정으로 번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전주 신흥학교도 이 일에 적극 참여하여 1930년 1월 24일 식민지 교육 철폐, 자주독립만세 등을 외치면서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 일로 신흥학교 학생 35명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이 중 재학생 함수만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여음이 사라지기 전에 교장으로 재차 부임했던 인돈 선교사는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교장실에 꿇어 엎드려 한국 민족과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보내 달라고 수없이 기도하였다. 민족 고난에 동참했던 인돈의 한국인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선교사와는 아주 달랐다.

인돈 선교사의 장모였던 로티 위더스푼(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은 목포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배유지 선교사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1901년 4월 배유지 선교사가 선교여행차 전주에 있는 동안 심장마비로 헨리와 차롯테를 남겨 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나 목포교회는 그의 순교의 피로써 하나님의 복이 호남 땅에 임할 것을 믿었다. 그래서 배유지 선교사의 부인 로티 위더스푼을 첫 순교자로 부르기로 하였다. 결국 그의 순교로 인해 호남 땅, 아니 전 한국 교회에 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일어나고 있었다.

인돈 선교사의 결혼

배유지 선교사는 자신의 부인이 순교하자 두 자녀를 데리고 1901년 4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그를 맞이하는 배유지 선교사의 집에서는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를 파송한 미국 남장로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배유지 선교사는 그의 여동생에게 두 자녀를 맡기고 부인의 순교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면서 곧 목포로 떠났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배유지 선교사가 매일 밤마다 목포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모든 교인들이 뜨겁게 역사하는 성령 체험을 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배유지 선교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헨리와 차롯테는 무럭무럭 잘 자랐으며, 그후 차롯테는 아그네스스코트대학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을 하고 어머니의 피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시 일본 관서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일본 여행을 하던 인돈은 미모의 선교사 차롯테에게 첫눈에 반하여 곧장 광주에서 사역하고 있는 배유지 선교사를 찾았다.

“배유지 선교사님, 선교사님께서 잘 아시는 대로 저도 아직 미혼입니다. 선교사님의 따님이 현재 일본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는데 저와 같이 선교 동역을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젊은 인돈 선교사의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피차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자신을 가진 인돈 선교사는 그 길로 군산으로 돌아와 선교사 숙소에서 문을 잠그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배유지 선교사가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인돈 선교사는 그 길로 그 머나먼 광주 양림촌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인돈 선교사님, 여기 차롯테 로티 선교사가 왔습니다.”

인돈 선교사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배유지 선교사의 말에 따라 차롯테 로티 선교사를 만나 즉석에서 인사를 나누고, 그 울창한 양림리 동산을 산책하면서 장차 한국 선교에 대한 미래를 설계하였다. 그후 인돈 선교사는 차롯테 로티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일본 관서지방 도쿠시마로 가서 여가를 보내다가 일본 주재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마이어 선교사의 집례로 결혼예식을 올렸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일생 동안 그 넓은 호남 땅을 가로지르면서 선교의 꽃을 피워 갔다.

군산에 잠시 머물렀다가 전주로 이거하게 된 젊은 부부는 전주를 자신의 고향으로 알고 어머니가 하지 못했던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인돈 선교사는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그의 부인은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교육 사역에 임하였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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