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아원 원장이 거울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립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얼굴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대성통곡을 합니다. 원장이 놀라서 ‘너희들은 왜 우느냐’ 물었더니 아이들이 그럽니다. “그 얼굴을 원장님은 가끔 보시지만 우린 매일 보잖아요.” 내 얼굴, 누가 더 많이 볼까요? 누가 더 자주 볼까요? 자신일까요, 타인일까요?
누군가 내게 그럽니다. “얼굴에 검댕이가 묻었어요.”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봅니다. 검댕이를 찾습니다. 그런데 “무슨 소리? 검댕이가 묻어 있을 리가 없어요. 나는 아침에 얼마나 깨끗이 얼굴을 닦고 나왔는지 몰라요” 한다면 정상일까요?
사회가 우릴 보고 자꾸 불편한 말을 합니다. 교회를 향해 이러쿵저러쿵합니다. 심지어 부끄러운 말과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신앙 양심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그런 영적 검댕이가 우리 얼굴에 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사회가 우릴 보고 그럽니다. 묻었다고, 더럽다고, 생채기 났다고, 냄새난다고….
그러면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로 우리는 한숨 쉬는 정도이지만 늘 우리를 보는 세상은 대성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의 최종 보루, 윤리와 도덕의 절대 보루, 공의와 정의의 버팀목인 교회가 상했다고, 변질됐다고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우릴 곡해한다고 모함하는 거라고, 본래부터 교회에 부정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심각하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가끔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며 상상합니다. 그리곤 스스로 흐뭇해합니다.
이 정도면 잘생긴 얼굴이지!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내가 보기에도 사실 별로인 듯합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거시기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고전 13:12) 거울로 보는 게 왜 희미할까요? 사도 바울 시대의 거울은 청동 거울로 면이 고르지 못했답니다. 고르게 한다고 하긴 했지만 사물이 그대로 보이기에는 면이 고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보긴 보는 데 희미합니다. 그런 거울로 자기를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자기 의식, 자기 느낌, 자기 상상, 자기 생각대로 보일 겁니다.
세상이 뭐라 한다면 절대적인 거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입견 없이, 편견 없이 자기를 비춰 봅시다. 빠져나갈 궁리 하지 맙시다.
자기 경험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면 그 얼굴은 얼마든지 그럴듯한 인생으로 화장(化粧)이 됩니다. 쌩얼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 목사의 얼굴인가, 이게 정말 장로의 얼굴인가…?’ 세상이 요즘 우릴 보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정말 돌아봅시다. 이게 내 얼굴인지….
양의섭 목사
<왕십리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