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른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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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피난길 <1>

내가 실명했던 뚝섬 일대는 그 당시 참외, 오이, 무, 배추를 생산하는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농부가 내게 다가와서 내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들려준 다음부터 시작된 고달픈 삶은 말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앞이 캄캄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기가 막힌 비극의 삶이었다.

땅을 기어다니면서 논두렁에 고인 물이라도 마셔야만 갈증을 면할 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했지만 난리 중이라 정작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밭을 뒤져서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풀잎이라도 뜯어먹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헤매기도 했다.

요란한 포성과 폭격 소리가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보따리를 등에 지고 머리에 인 피난민들의 행렬은 끝이 없는 듯했다. 나도 어느새 그 행렬에 끼어서 무작정 남하하고 있었다. 

문득 경기도 양주로 시집간 고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그 고모님은 부잣집으로 시집갔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눈도 치료하고 공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며 그곳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정작 그곳을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끊어진 한강 다리 건너기

이미 한강 다리는 폭격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양주까지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피난 가는 달구지 뒤를 따라가기도 했다.

막상 한강에 도착하고 보니 수많은 피난민들이 끊어진 한강 다리 앞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낮에는 폭격으로 인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피난민들은 밤에 몰래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비싼 뱃삯을 지불해야 강을 건널 수 있었던 터라 나는 강을 건너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피난민들의 짐짝 틈에 몰래 들어가 한강을 건넜다.

한강을 건넜으나 막상 내가 찾아가야 할 친척집은 무려 100여 리 되는 것이라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집은 그곳뿐이니 어찌할 것인가. 천리 길도 한 발짝부터 내디뎌야 했기에 앞도 못 보는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가기도 하고, 잠시 앉았다가 일어나 울면서 먼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요, 인정이 메말랐기로서니 죽으란 법은 없었다. 가는 곳곳마다 피난민들이 모여 밥을 지어 먹는데 그곳을 찾아가 밥 좀 달라고 사정하면 불쌍해서였는지, 아니면 귀찮아서였는지 먹다남은 밥을 물에 말아서 건네주곤 했다. 반찬이라고는 고추장 하나뿐인데 그것도 나에게는 감지덕지했다. 그 밥맛은 정말 꿀맛처럼 달았다.

며칠 간 굶기도 하고 얻어먹기도 하면서 물어물어 친척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는 참외밭이나 오이밭이 있었는데 피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따다가 먹었다. 나는 그들에게 달라고 해서 얻어먹을 수 있었다.

고모 집에서 받은 수모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친척집에서 나는 말할 수 없이 푸대접을 받았다. 천대와 학대와 멸시, 아니 차라리 핍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설과 저주의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지옥이 어디 따로 있을까 싶었다.

그때 일을 낱낱이 기록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편 어린 가슴에 맺힌 한을 들추어내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심정으로 그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부득불 말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내게 모진 학대를 했던 그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셨기 때문에 행여 그분들에게 누를 끼치진 않으리라 믿는다.

물론 지금 나의 가슴속에 그들로 인해 맺힌 한의 응어리가 남아 있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보혈 공로를 의지해 이미 그들의 잘못을 용서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점도 밝힌다.

내가 받은 천대와 구박도 말로 다 형언키 어렵지만 그들이 내게 던진 가혹한 말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선태 이 녀석아, 너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니 일찌감치 나가서 물에 빠져 죽든지, 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 버리든지, 아니면 총에라도 맞아 죽는 것이 팔자 중에 상팔자니 네 맘대로 나가 죽어 버려. 내 눈앞에 보이지 말아라!”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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