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톡] 작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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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영’이라는 말은 내가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이주민 목회를 하며 느끼는 비애감 중 하나는 배반을 당하는 경우다. 배반을 당한다는 것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배반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셨다. 하물며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이야 어떠하랴? 우리는 배반하고 배반당하는 이중성의 삶을 살고 있다. 나도 누군가를 배반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로부터 배반을 당해왔다. 단지 내가 배반한 것은 잊어버리고 배반당한 것만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배반하고 배반당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배반사건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가룟 유다로부터요, 다른 하나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로부터다.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겼으므로 너무 충격적이며, 베드로의 배반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 대부분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두려워하며 예수의 곁을 떠났다. 때로 인간의 연약함이 배반을 만든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때로 소중한 만남과 관계를 깨뜨리는 우를 범한다. 돌아보니 나도 그랬다. 많은 이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고 살았는데 제대로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게을렀고 무심했으며 때로는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참으로 무심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내게 배반의 아픔을 준 이들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아파하며 고통받는다. 너무도 이중적이다. 배반을 잊고 배반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내가 잘나서 오늘의 나섬과 몽골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성장하고 인정받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 덕분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다. 함께 살아온 모든 이에게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누구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한다. 그러다 내가 너무 웃기고 비겁해 비웃음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수없이 주님을 배반했다.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라고 소리 지른 군중의 틈에 서 있었다. 나도 그를 부인하고 배반했으며 도망치듯 십자가를 멀리하며 살아왔다. 예수를 배반한 것은 잊어버리고 내가 당한 배반만 생각하며 이를 갈고 살았다. 용서를 받았지만 용서하지 못했다.

배반하고 살아온 삶이 너무도 부끄럽다. 용서받아야 할 나의 죄악이 너무 크다. 십자가 앞에 다 묻어버리고 싶다. 

목에 작은 십자가를 걸었다. 십자가를 만지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없다. 용서를 구할 것밖에는 없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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