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미국 LA에는 마침 케네디 이민법으로 이민의 물꼬를 트면서, 상당히 많은 수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중 많은 수의 사람이 LA에 정착함으로 나성(羅城)이라 불리던 이 도시는 한국인들이 활개치는 도시로 급변했다. 이때 한국의 유수한 인재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민을 왔으며, 그중에는 한국의 저명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A와 B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학생으로 와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지 않고 미국이라는 신천지에서의 생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하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지탱하기가 어려워 3년 차이의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영주권도 해결할 겸 당시에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무난히 운영할 수 있는 그로서리 마켓(Grocery Market)을 경영하기로 합의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부모님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우선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각자의 형편대로 선배인 A가 60%를 그리고 후배인 B가 40%의 자금을 모아 적당한 가게를 함께 물색했다. 비록 세 살의 나이 차이는 있지만, 한국에서 같은 학교 선후배였으며, LA에서는 같은 시기에 한 학교에서 수학했기에 그들의 우정은 친형제보다 더욱 가까웠다. 그러면서 가게를 찾고 함께 계획을 의논하면서는 더욱 친형제 같은 느낌을 간직했다. 앞으로의 업무 분담 같은 것은 따지지 않았고, 이익 배분도 절반씩 갖는 구조를 서류도 없이 서로가 묵인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때마침 늘어나는 교포들 덕분에 가게는 번창하면서 앞에서 걱정해야 할 일들은 따져볼 시간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가게는 점점 번창해가면서 피로는 쌓였고 서로 간의 우정에도 서서히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잡념을 잊고 누구의 당번인지도 따지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 비록 일할 의무가 없어도 부인들도 시간이 나면 가게로 나와 정리라도 하면서 도왔다. 이렇게 불철주야로 일을 해 가게도 잘 되면서 이제는 한숨돌릴 때가 되었다고 여기면서 ‘우리가 너무 일에만 매몰되지 않았나?’하는 생각과 ‘그런데 이런 일들을 나만 더 열심히 하지 않나?’라는 의심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 없이 일에만 열중하느라 잊어버렸던 상대방의 잘못이 서서히 마음속에 생겨났다. ‘그동안 내가 너무 손해 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이제는 동업을 정리할 때가 왔고, 그러면서 이왕이면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여겨졌다.
다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었고 좋은 낯으로 서로 이별할 것을 상의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기에 결론은 생각처럼 잘 되었다. 가게는 A가 차지하고 대신 상당한 보상금을 B가 갖게 되었다. 서로가 자신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위치에서 대화하면서 서로를 더 위해주었기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란 애초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예전의 우정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결말을 보고 있던 동문들에게도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제 인생의 말기에 들어선 두 사람은 아름다웠던 예전의 우정들을 되씹기만 하면 되니, 누가 이겼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