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함께 가야 할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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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골프를 할 때, 함께 공을 치는 ‘네(4) 사람’을 ‘동반자(同伴者)’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르기는 해도 의사소통의 편의상 ‘팀(team)’이나 ‘그룹(group)’ 또는 ‘조(組)’라고 해도 의미는 통할 듯하다. 문 장로는 골프에 문외한(門外漢)이어서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이때의 ‘동반자’를 영어로는 뭐라고 하나?”하고 물었더니 ‘four-some’이라는 문자가 왔다. 이때의 ‘four-some’을 구태여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4인조(人組)”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이서 5시간 이상을 함께, 한 방향으로 가야하고, 매순간 순간, 공감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동반자’라고 하나보다 하고 짐작해 본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골프를 할 때, ‘좋은 골프장’보다는 ‘좋은 동반자’와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즐겁고 운동을 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인 골프는 예절과 공정이 몸에 배인 ‘동반자’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퀴즈를 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두둑한 상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모에 나섰다. 물리학자, 수학자, 교수, 설계사, 회사원, 학생들이 저마다 기발한 해답을 제시했다. 하지만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답안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길은 멀고 험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날씨가 좋을 때 만나는 손님보다는 폭풍우 속에서 비바람을 헤치고 온 사람을 더 따뜻하게 환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는 이렇게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이 많다. 그 길을 무사히 행복하게 가자면 가족, 친구, 동료 등 이런 ‘인생여행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라피크(Rafik)’란 아랍어는 《먼 길을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좋은 동반자’란 ‘상호간에 공감이 가는 사람, 함께 느낄 수 있고,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좋은 동반자가 취할 행동은 아마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행동을 하는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것이 좋은 ‘동반자’의 조건이 아닐까 여겨진다.

개인이든 국가든 좋은 ‘동반자’의 필수조건은 공감(共感)이다. 악성(樂聖) 베토벤의 성공엔 이런 ‘공감의 동반자’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였다. 천둥치는 어느 날, 소년 베토벤이 마당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었다. 소년은 나뭇잎에 스치는 비와 바람의 교향곡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집으로 빨리 들어오너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함께 비를 맞으면서 아들에게 “그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은 신이 났다. “엄마, 새소리가 들려요. 저 새는 어떤 새죠? 왜 울고 있어요?” 어머니는 폭우(暴雨)처럼 쏟아지는 아들의 질문에 다정하게 응대했다. 위대한 베토벤의 교향곡은 아마 그때 밀알처럼 싹이 돋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동반자’를 원한다. 인생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바로 나 스스로가 먼저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홀로 비를 맞는 상대에게 다가가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이다. ‘라피끄(Rafik)!’ 그렇다. 이런 ‘영혼의 동반자’가 무척 그리운 세상이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가족과 동반자들이 있을 때, 더욱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게 되며 더욱 건강하다는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이브(하와)’라는 배필(配匹)을 만들어주신 것을 보면 우리의 삶속에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성경에는 귀한 만남의 이야기가 매우 많이 등장하거니와 그 중에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 만남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친구로서 사랑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성경 속 만남’일 것이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자이고 다윗은 목동으로 하찮은 ‘양치기 소년’이었다. 신분과 나이가 다른 이 두 사람이 서로 귀한 우정을 쌓으며 서로를 향해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듯,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통분모’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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