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선교 350년의 실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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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그 뒤 이어 배척 대상으로 인식

1941년 일본이 진주만과 홍콩, 말레이반도를 공격하자 네덜란드는 동맹국과 합세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그러나 1942년에는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침공하여 1월 말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의 연합함대를 자바해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1942년 3월 8일에 네덜란드는 동부 자바의 깔리쟈띠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총독이 체포됨으로써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42년 3월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점령하고 네덜란드의 식민시대를 종식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처음에는 해방자로서의 일본을 환영하였지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발발자인 점과 또 인도네시아인들의 인명피해와 경제적 희생이 커지자 차츰 과거 네덜란드처럼 배척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왜 네덜란드의 기독교 선교는 인도네시아에서 배척받게 되었을까? 서구의 강압적인 기독교 선교가 인도네시아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인도네시아의 반네덜란드 식민주의 운동은 곧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네덜란드가 기독교를 앞세웠지만, 전혀 기독교답지 않았던 칼빈주의 장로교는 이슬람 민족주의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지는 비극을 자초하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인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지배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인과 충돌을 피하려고 중국인 우대정책을 쓰는지 보니 인도네시아 농민의 민족주의를 불러왔다. 중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농민의 유통망을 장악하자 민족주의에 불을 붙인 최초의 이슬람 단체는 사례캇 이슬람(Sarekat Islam)이다. 사실 이 단체는 서구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에 맞서 이슬람교의 보호와 확산에 더 큰 목표를 가졌던 인도네시아의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주자였다. 사례캇 이슬람 민족주의 운동은 중국인의 상권 확대를 거부하고, 네덜란드 상인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 농민의 이권을 보장해주었다.

윌리엄 캐리가 1천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유럽의 기독교 선교를 일깨우며 인도에 복음을 전했어도 힌두교가 강력한 인도에서 아직도 기독교 선교가 미미한 것처럼,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슬람 민족주의에 발목이 잡혔다.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중동의 공격적인 이슬람과 달리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은 유순하고 평화적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은 이슬람이란 단어 자체가 평화를 뜻하기에,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이슬람이란 용어 자체부터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이슬람이란 단어는 평화가 아니라, 폭력을 뜻하는 아람어 어근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슬람의 폭력성이 인도네시아에서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수천 개의 교회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비극적인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선교사들은 이슬람의 본질인 코란 자체가 기독교에 대해 “이교도(기독교인)의 목을 치라”고 거듭해서 촉구할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중동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도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지만 서구 기독교가 강압적인 식민 통치로 그르친 인도네시아 선교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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