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막강한 무적해병 민주대한 큰 방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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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해병상륙사단 전 정훈참모 정채호 예비역 중령 발행 ‘나의 해병시절’ 제4집에 나의 시 “해병은 살아 있다”가 실려 있다. 나는 1960년대 초에 해병진해기지 정훈에 근무하며 해병진해주보편집, 창작활동, 반공웅변대회 일등 연사로 활동하다가 제대했다. 정훈참모를 위해 해병학교 정훈교재 준비를 하다보니 해병의 빛난 전통을 알 수 있었다. 우선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나라의 부름을 받아 해군 신병 13기 300명, 장교 26명, 하사 54명 모두 380명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역사적인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신현준(1915-1966) 대령(예비역 중장)이 맡아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초기 지리산 공비토벌을 하다가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을 받아 우리 해병대는 창설되자마자 6.25 한국전쟁 최일선에서 싸웠다. 무기가 열악해 남한정부가 북한군에 거의 다 점령 당하고 대구 부산 마산 진해만 남았을 때 통영 요충지를 점령당했다. 1950년 8월 17일 해병 김성은부대가 야밤에 통영상륙작전에 승리해 미국 여종군기자 마가릿 히긴스(1920-1966)가 ‘귀신잡는 한국해병대’의 신화를 이루는 기사를 썼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사병 일계급 승진 특사를 내렸다. 김성은 중령은 중장 예편 후 장수 국방장관도 지낸 교회 장로였다. 최후 낙동강 전선을 백선엽(1920-2020) 장군(31세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역임) 중심의 육군이 지킬 때 성공 확률 5천분의 1밖에 안되는 인천상륙작전을 맥아더(1880-1964) 육군 원수가 미해병대와 한국해병대를 지휘해 기적같이 성공하고 서울로 진격해 9.28 수도탈환의 태극기를 휘날렸다. 북진하는 해병대는 양구 도솔산고지(1951. 6. 19)를 탈환해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무적해병(無敵海兵)의 휘호를 써서 난공불락의 도솔산고지 점령의 승리를 크게 격려해 주셨다. 도솔산고지 탈환의 여세를 몰아 한국해병대는 중부 전선의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 탈환에 승리를 이뤘다. 휴전을 앞두고 장단(사천강) 전투도 해병대는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동해안 양도작전도 큰 승리였다. 

1965년도 월남으로 파병된 월남 짜빈동 해병전투도 한국 1개 중대 병역으로 베트공 사단병역을 용감하게 물리쳤다. 전사에 빛나는 전공을 거두었다. ‘나가자 해병대’ 노래하는 해병대는 오늘도 대한민국 민주 자유 수호에 앞장서 있다. 3군에 앞장서서 나라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나라의 막강한 해병대는 한때 해체당하는 수난도 겪었다. 5.16 군사정변도 해병대의 힘으로 한강을 건너 승리했다. 정예부대 해병대는 4군체제로 4성장군 해병참모총장이 나와야 한다. 육군 해병 두 중장을 국회법사위에 증인으로 불러 병역 미필 국회의원이 얼차려 시켜 육군 해병 사기를 꺾은 일은 유감이요, 국민의 분노와 비난도 높았다. 민생은 뒷전으로 팽개치고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채상병해병특검법’을 밀어붙이는 야당 횡포는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100만 예비역 해병들이 해병 채 상병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는 시위도 지난 6월 27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크게 펼쳤다. 그러나 보도 기사는 조선일보에 6월 28일자에 보일 뿐 방송이나 다른 신문은 잠잠했다. 방송 언론작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좌파정부에 실망해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정부를 국민이 탄생시켰는데 무능하다는 야당의 심판을 받고 총선 참패 후 많이 움츠러 들고 있다. ‘국민의 힘’ 국회의원들도 너무 나약하고 한 종교인의 정치투쟁만도 못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목숨 걸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과감한 윤석열 정부의 정치를 기대해 본다. 야당도 정권쟁취 수단만 찾지말고 여야 협치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해야 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 말씀처럼 자신이 인물 될 공부를 하여 건전한 인격체로 나라 겨레 사랑의 일꾼 되길 기대한다. 무적해병 해병대는 오늘도 대한민국 막강한 방패로 굳게 뭉쳐 앞장서 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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