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이승만의 결단-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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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8. 한국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2만 7천389명을 전원 석방한 것은 예상 밖의 대사건이었다. 1953.6.8. 미국은 반공포로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무시하고 북한과 중공을 상대로 포로 교환 협정에 서명했다. 이틀 뒤 이승만 대통령은 군 수뇌부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경부대로 불렸다. 그리고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방안을 비밀리에 검토했다. 그리고 6월 17일 이 대통령은 원용덕 장군에게 포로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 6.18. 국군 헌병대는 각 포로수용소의 철조망을 절단했다. 헌병들은 호주머니에 고춧가루와 모래를 섞어두었다가 미군이 달려들면 얼굴에 뿌리며 제지했다. 헌병들은 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3년간 우리를 위해 싸워준 미군을 제압하고 부산, 대구, 영천, 마산, 광주, 논산, 부평 등 각 수용소에서 2만 7천389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 사건은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18 오전 11시 공식 성명을 통해 자신의 결단이 국제법상 정당함을 밝혔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를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이 있었다. 6.25전쟁이 시작된 반년 뒤인 1950년 12월경 북한군 인민 포로는 14만 명에 달했다. 1951년 2월에 설치된 경남 거제도 포로수용소엔 17만 명의 포로들이 있었다. 이후 전쟁포로 송환 협상이 진행됐지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반공포로가 나타났다. 중공군 포로를 포함한 16만 9천983명 가운데 8만여 명이 송환을 거부했다.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기독교인 포로들이 포로 북송을 막아달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포로들이 강제 송환을 거부한 데는 당시 UN군 군목이었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헤럴드 보켈(Harold Voelkel) 목사와 그의 지시를 받아 포로수용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임찬상, 김윤찬, 강신정, 임재수, 박지서, 남기종, 강응무 등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이 컸다. 1948년 건국과 함께 군내 종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종제도가 이미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활동에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상규(전 고신대)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념적 대립은 폭력과 살인을 동반했다. 이런 곳에서도 간이 천막을 치고 전도하며 집합 예배를 인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포로로 잡혀 온 임한상 목사였다. 임 목사는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주일 예배를 시행했다.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위난한 환경에서 집합 예배를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비난했으나 점점 신자를 얻게 되었다. 19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 속에서도 울타리 없는 야외에서 4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감동적인 성탄 예배를 드렸다. 옥호열 선교사가 거제도에 도착한 것이 바로 1950년 12월 성탄 예배 직후였다. 목숨을 건 예배는 결국 포로 선교의 기초가 됐고 그 결과 6천 명의 인민군 포로가 회심했으며 2천266명의 인민군 출신 포로가 세례를 받았다. 또한 642명의 포로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하게 했다. 임한상 목사와 옥호열 선교사의 전도와 예배 인도로 인해 반공 기독교인 포로 수가 증가했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반공 포로 석방으로 인해 과감한 정책을 펼 수 있게 됐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선교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만 1만 6천 명이 넘었다. 포로들에 대한 선교가 신앙 중심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미국과 한국의 선교사들은 포로수용소 순회 예배에서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한·미 동맹을 강조했고 그 결과 한·미상호 방위조약 체결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안보와 정치적 독립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인 전쟁터,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 거기서 포로가 되어 자기 운명을 예측할 수 없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한계상황에서 그리스도 복음을 통해 새 삶을 찾게 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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