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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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신사참배, 공산 치하 김일성 정권 충돌

훌륭한 목사 청빙하기로… 김철훈 목사 댁 방문

1946년 11월 3일 주일 총선거에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 5도 연합 노회장 김진수 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 목사가 주일 선거에 반대하자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어 검거했다.

당시 상황은 조선기독교도 연맹 강양욱 목사의 집에서 가끔 총소리가 나는 험악한 형편이었다. 조선기독교도 연맹은 사상범 색출방법으로 목사들에게 조선기독교도 연맹 가입공문을 보냈으나 김철훈 목사는 되돌려 보냈다. 김철훈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936년 제29회 졸업생이고, 강양욱은 장로회신학교 제36회 졸업생이었다. 7년이나 선배인 김철훈 목사를 체포해 갔다.

김철훈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참배, 공산 치하에서는 김일성 정권과 충돌했다. 따라서 해방을 맞이하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찰 감시대상으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나날을 보냈다.

시국이 점차 험악해지고 감시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렇게 되자 자유 세계를 염원하는 성도들이 급증해 하루가 다르게 월남길에 오르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다.

1947년을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가 되자 공산당의 행패도 날로 가중되어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귀국한 배민수 목사로부터 인편으로 빨리 월남하라는 기별이 왔다. 김철훈 목사는 교인들을 두고 월남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동평양교회에서 목회한 지도 오래됐다. 교회는 여러모로 발전했고, 교인들은 한 식구처럼 정이 들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에서 오라는 것이었다. 산정현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최후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를 낳은 교회였다. 일제 치하에서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그리고 일제는 산정현교회를 폐쇄했으며, 일본 군인은 산정현교회를 군대 막사로 사용했다. 이제 해방을 맞이하여 예배당을 다시 찾은 기쁨이 컸으나 교회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옥중에서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싸우다가 출옥한 방계성 전도사 등은 강경노선을 택했고, 반면에 주기철 목사를 뒷바라지하던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교인들은 온건 노선을 취해 대립되었다.

이 싸움은 교회당을 누가 점령하느냐 하는 교회쟁탈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1947년 한 해는 7개월 동안 강단 쟁탈전으로 세월을 보냈다. 결국, 방계성 전도사와 강경파들이 세에 밀려 따로 나가 교회를 개척함으로 싸움은 끝났다. 그래서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평양노회에 복귀시키게 되었다.

이들 싸움에 상처받은 것은 성도들이었다. 그동안 교인들이 싸움에 지쳐서 다른 교회로 흩어졌고, 또 150여 명이 분열해 나가 최후로 남아 있는 교인은 불과 200명 정도였다. 한때는 1천 명이 넘었던 교회가 이토록 작은 교회가 된 것은 눈물겨운 일이었다.

유계준 장로를 위시한 몇몇 장로들은 교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목사를 사방에 수소문해 찾아 청빙하기로 했다. 결국, 김철훈 목사를 모셨으면 하는 생각 가운데 유계준 장로는 김철훈 목사 댁을 방문했다.

“김철훈 목사님, 소식을 들어서 아시겠으나 우리 산정현교회는 과거의 명성과 걸맞지 않게 싸움만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렸는데 부디 오셔서 이 무너진 산정현교회를 다시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애원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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