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행복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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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명상에 잠겨본다. 일체의 상념을 떨쳐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어느 때였던가를 조용히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꿈을 가꾸어가는 학창시절이라 여겨진다. 그때는 모질고 끈질긴 아픔을 감내하느라 힘겹던 시간들이었음에도 왜 그리도 행복했다고 느껴질까. 그것은 꿈을 이룩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보람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나를 아는 이들은 현재 생활을 보고 퍽 부러워한다. 그 이유는 젊었을 때에는 국가에서 월급을 주어 어려움 없이 생활해 왔고, 정년퇴임 후에도 공무원 연금으로 큰일 없이 편안히 생활함을 보고 하는 말이다. 또 자식 네 명이 모두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두 자녀는 중국과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자기들의 삶을 잘 영위하고 있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살아왔던 당시는 너무도 험난했다. 1941년에 태어났으니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있었고, 1945년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미소(美蘇)가 3년간 신탁통치로 사회는 혼란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고, 1960년 독재와 항거한 4·19혁명과 5·16 등 온갖 파란만장한 역경과 함께 굶주리는 ‘보릿고개’까지 몸소 다 겪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을 할 때였다. 그 전날부터 내린 엄청난 폭설로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읍내는 모두 배달을 마쳤고 외딴 마을을 향해 갈 미명시간이었다. 논으로 둘러싸인 허허벌판 한 가운데에 신작로가 있었는데 흰 눈으로 가득 덮여 어디가 도로요, 어디가 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걸었으나 그만 도롯가 하수구에 빠지고 말았다. 먼동이 트려는 무렵이지만 행인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길거리 하수구에 빠졌으니 두렵기는 했지만 다행히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는 물이 흘러 발이 몹시 시렸다. 그런 가운데 한 5분가량 홀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도로로 빠져나왔다.

옷을 털고 신문은 주섬주섬 챙겼으나 겨울 세찬 바람과 함께 하수구에서 젖은 발은 떨어질 듯 몹시 시렸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으니 어찌 내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가자. 신문을 들고 뛰어 배달을 모두 마쳤다.   

그날 밤 꿈같은 일이 있었다. 잠자리에 막 들어가려는 참인데 무언지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헛것이 이리도 보이는가. 이런 생각에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분명히 눈앞에는 어느 호화스러운 거실이 보였다. 그곳엔 소파와 탁자, 안락의자가 놓여 있는데 갓 40대로 보이는 신사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참으로 멋지다. 저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 순간, ‘그이가 바로 나의 미래모습’이라는 생각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환상이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 상념에 젖은 영상이면 어떠냐.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내 미래라니 얼마나 감격한 일인가. 나는 그 순간 단정히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어떠한 고난에도 이를 돌파해 기어이 꿈을 이루겠다고 나의 굳은 의지를 주님께 드렸다. 그리고 전날 교회에서 이윤복 장로님이 가르쳐주신 찬송가 364장(새찬송가 338장)을 몇 차례 부르고 나니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 해 검정고시도 합격해 고등학교 진학의 꿈은 불타고 있었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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