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 광복 후 기쁨은 잠시뿐 친미파와 임정파, 반탁과 찬탁의 갈등, 좌익과 우익의 주도권 싸움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북한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기습 남침을 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소련제 탱크 242대 등을 앞세우고 남으로 남으로 낙동강 주변까지 공격해 왔다. 한 대의 탱크도 없던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6월 27일 개입해 워커 장군 주도하에 국군과 미군이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로 전선에 나섰다. 국토의 90%를 인민군에게 빼앗기고 부산, 대구, 마산 등 국토 10%의 풍전등화 속에서 55일간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과 사생결투의 전쟁을 9월 초까지 계속하였다. 낙동강 방어 전선에서 14개 사단의 인민군들이 총공세를 취하는 기간에 맥아더 장군 주도의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감행되었다. 승산이 없다던 이 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함에 따라 기세를 몰아 9·28수복에까지 이르러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게 되었다. 허를 찔린 인민군은 황급히 철수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면서 양 진영이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양 진영 모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입고 전쟁 발발 74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도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된 나라들이 모두 통일되었다. 지금은 탈이념시대이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의 주장처럼, 오늘날은 이념을 넘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시대이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화 시대이다. 이념보다 생명을 더 존중해야 하는 인권존중(人權尊重)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은 시대정신을 망각하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공포정치를 멈추지 않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를 억압하면서 북한 주민의 생존권보다 오직 체제수호에 혈안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처럼 체제수호의 공고화를 위해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적으로 독재자로 지탄받고 있는 푸틴과 결탁해 민족통일의 희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국가의 주권은 개인 가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왕조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북한은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다. 근거 없는 백두혈통이 진실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나라의 주권을 왕조국가 시대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반통일정책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의 양심세력들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던 이탈리아통일이나 독일통일을 바라보라. 북한정권은 주체탑을 높이 세워놓고 과연 북한 주민의 주인의식을 존중하고 있는가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한 정권은 한반도 적화통일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 러시아나 중국의 첨단기술을 전수 받아 세계적 군사 강국을 과시하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대고 6·25와 같은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적인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거의 순수하게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깨어 있는 국민정신과 철저한 대처가 절실하다. 그러면서 단순 대응의 자세를 넘어서 각별한 인내심을 가지고 북한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아 공존‧공영의 길에 동행하는 날이 앞당겨지도록 부단한 설득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