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의 짧은 식민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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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투쟁과 인도네시아 공화국 시대

일본 식민지 정부는 네덜란드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초기 정책 실패를 청산하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식민지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2차 대전 말엽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도네시아를 독립하기로 하고 수카르노, 모하마드 하따와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지원과 예우를 하였으며 독립 후에 국가 방위를 할 수 있도록 청년 민병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네덜란드의 350년간의 식민시대보다 3년간의 일본 식민시대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35년 동안 잔혹한 식민통치를 통해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한국어 사용을 원천 봉쇄한 일제의 만행이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불러온 것과는 달리, 짧은 인도네시아 통치 기간에 일본은 경제 개발에 지배력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현재는 많이 줄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의 차량과 전자제품 등 많은 부분의 90%가 일제였다. 그만큼 일본이 한국에서 민족 말살 정책을 강압적으로 자행한 것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에서 전략적으로 식민 통치를 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등을 식민지화한 것과는 달리, 태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정책을 펴서 태국인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협력을 받아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강대국이 원한다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자주적인 외교 덕분에 태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도 받지 않았다. 태국과 경제 협력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본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이 태국처럼 인도네시아에도 경제적으로 전폭적인 도움을 주는데,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가 마다할 일이 없었다.

1945년 제2차 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끝나자 일본군은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물러나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그의 자택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치리 수카르노와 하따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부통령으로 각각 취임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2차 대전 이전의 식민지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며 영국군의 지원 아래 단계적으로 다시 인도네시아에 입성하였다. 그 후 인도네시아는 영국 및 네덜란드 군대를 상대로 힘겨운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인도네시아는 4년간에 걸쳐 네덜란드에 대한 독립 무력항쟁을 하였으며, 1949년 13월 37일 UN과 미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압력 속에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에 양도하였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4년간의 독립항쟁은 종결되었으며 1950년 9월 인도네시아는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독립 후 10년간의 풍랑 후에 1955-57년에 걸쳐 내전이 있었던 후 수카르노 대통령은 의회를 구성하였고, 1957년에는 네덜란드 국적인 6만 명의 추방을 명령하였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자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수카르노 사후에 예상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의 기선을 제압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당시 수하르토 전력 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의 신속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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