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 여유 찾으면 길 보여… 성숙함 발로
지나친 두려움 극복해야 기회 잡을 수 있어
천덕꾸러기였던 원단 ‘효자 상품’으로 둔갑
바로 그때, 김 회장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그 집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피아노로 다가가 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을 쳐다보니 외롭기 짝이 없네~” 등 누구나 아는 동요 가락을 단음으로 연주했다.
연주는 단순했지만 새벽으로 접어드는 한밤중 조용한 주택 안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은 조금 전까지 전쟁터 같았던 공간의 공기를 마법처럼 바꿔놓았다. 한 치도 물러섬 없던 상대방의 눈매가 따뜻하게 풀려가는 것이 보였다. 최 사장이 때마침 나서서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하면서 동결한 어음을 해제해 주십사고 권유했다.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조금씩 풀려나갔고, 몇 가지 조건들을 합의한 뒤 새벽 동틀 무렵 김 회장과 우리는 모든 일을 잘 마무리하고 어슴푸레한 하늘을 보며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부도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날 보여준 김 회장의 여유로움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회상해도 전율이 온다. 그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분도 아마 속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기의 순간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으면 길이 보인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함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성공은 위기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급한 상황에 몰렸을 때 조급함과 자기학대, 과격하게 자기주장만 관철하려는 태도에 빠지면 오히려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지레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려 스스로 침몰하게 된다. 지나친 두려움을 극복해야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옹벽을 뛰어넘다
이후로도 위기의 순간은 수도 없이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2년 8월 3일, ‘8‧3 긴급금융조치’가 내려졌다.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고금리의 사채 부담을 해소해주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긴급 조치 15호-사채 동결 긴급 재정 명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기업들의 모든 사채를 3년간 동결하고 3년 거치 5년 분할로 상환하도록 한 조치였다. 이 조치 이전에 진 빚에 대해서는 이자를 줘서도 안 되고 원금을 갚아서도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지금의 ‘회사 법정관리’ 조치와 같은 것을 모든 기업과 개인 거래에 한시적으로 적용한 셈이다.
이 조치로 숨통이 트인 기업도 많았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자금난에 처했다. 여러 공장들에 지급해 놓은 선급금까지 사채로 간주되어 동결됐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선급금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 계산해서 앞으로 발생할 물품대금을 미리 지급하는 관행이 있었다.
한 거래처에서는 돈 대신 물건을 주겠다고 했다. 선급금만큼 외상매출 처리를 해준다는 것이다.
“일본 미쓰비시에서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서 발주해놓은 물건이 생산 완료되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클레임을 건 뒤 가져가지 않은 재고품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거라도 가져가세요.”
거절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령으로 발표된 긴급조치를 절대로 위반해서는 안 되는 사회 분위기 탓이었다.
창고에 가보니 원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럽 수출용이라고 서유럽과 미국인 기호에 맞춘 호화로운 프린트 패턴의 여성 양장용 작물이었다. 디자인이 크고 색상이 너무 화려해서 국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이 가격을 절충해서 원단을 모두 인수했다. 회사에 돌아와 설명하니 직원들은 모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패션 트렌드와는 너무 거리가 있어요. 지금 내놓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금난을 해결하려면 어떻게든 물건을 팔아야 했다. 나는 일단 샘플을 들고 우리가 거래하는 도매 점포들을 찾아갔다. 전국 양장점을 대상으로 도매업을 하는 점포들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업주들은 이런 도깨비 같은 패턴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정사정하며 억지로 떠넘기다시피 하자 겨우 몇 군데가 그동안의 거래관계를 생각해 마지못해 허락했다.
“알았어요. 그럼 딱 일주일 만입니다.”
일주일 동안만 좋은 자리에 진열해주되 인수하는 것은 아니고 위탁판매만 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국내시장에서 절대 안 통할 거라던 그 원단은 알고 보니 국내 디자이너들이 고대해온 것이었다. 당시는 미국, 유럽에서 패션 경험을 쌓고 돌아온 디자이너들이 속속 자기 브랜드의 매장을 오픈하던 시기였다. 몇 년 후인 1978년쯤부터는 ‘세계 패션그룹 한국지부’가 설립되는 등 한국에도 세계의 패션 트렌드가 적극적으로 반영됐지만 그 당시엔 동대문시장에서도 그런 수요가 있는지조차 아직 모르고 있었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하던 원단이 ‘꿈의 원단’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천덕꾸러기였던 원단은 곧바로 ‘효자 상품’으로 둔갑했다. 재생산에 재생산까지 들어갔고 도매상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주문을 해왔다.
몇 년 후 비슷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신앙촌에서 부산 기장군에 설립한 섬유회사 ‘시온합섬’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시온합섬은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뽑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회사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 SK그룹의 근간인 선경합섬, 그리고 코오롱상사와 동양나일론까지 세 회사 이외에는 할 수 없었던 폴리에스테르 원사 생산을,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신앙촌이 정부의 허가를 얻어내고 일본 기계를 수입해 막 시작한 참이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