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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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재정 어려운 학교 적극 지원

전주 선교사 촌에는 뜻하지 않은 경사가 일어났다. 1923년 4월 1일 윌리엄 린턴 2세가 출생하였고 다시 1924년 4월 21일에는 유진 벨이 2년 후인 1926년 2월 22일에는 휴 매킨타이어가 태어났으며, 1년 후인 1927년 12월 24일에는 토마스 드와이트가 태어났다. 이들은 모두 전주에서 태어나 아름답게 성장하면서 목포에서 순교한 외할머니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장성하였다. 인돈 선교사의 어린 자녀들은 차롯테 로티 선교사의 기도로 잘 자랐으며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1년 일제가 한국에 나와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자 인돈 선교사는 그의 부인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인돈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총회 본부 부총수로 교단의 실무를 맡았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인돈 선교사는 1946년 6월 단신으로 전주에 도착해 미군정의 협력과 동문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전주 신흥학교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미 학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운동장에는 미군 막사가 있었으며, 교사도 미군의 행정사무실로 징발되었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전주 신흥학교뿐만 아니라 전주시 전체가 어수선하였다. 이때 인돈 선교사는 과거처럼 복음 사역에 임했던 전북노회 목회자를 찾아 신흥학교 이사회를 조직하고, 1946년 11월 26일 동문과 전주 시내 교인들,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복교식을 거행하였다.

인돈 선교사는 해방된 한국의 교육은 한국인이 맡아야 한다면서 모든 재산들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 다시 전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교육에 임하였다.

대전에 대학을 세워야 합니다 

뜻하지 않은 한국 전쟁으로 인돈 선교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9.28 수복이 되면서 다시 전주로 돌아와 어려웠던 신흥학교를 지원하고 일류 학교로 만드는 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한편, 해방과 함께 호남 지방의 대부분의 남·여 학교가 재건되었으며, 한국 전쟁을 통해서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동안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였다. 뒤늦게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대두되자 1949년 전주선교부, 광주선교부, 순천선교부, 목포선교부, 군산선교부에 선교사들을 상주시키면서 모든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선교부의 재단 책임을 맡고 있던 타마자 선교사는 광주에 대학을 설립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그 일이 무산되었으며 다시 재론되자 대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장차 대전에 선교부를 상설기구로 존속시킬 것을 생각하고 대전 시외 오정리에 있는 땅을 매입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런데 도 당국에서는 공공기관을 설립하려면 거기에 대한 계획서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타마자 선교사는 대학병원, 성경학교 등을 설립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하였지만 도 당국에 의해 실현성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기에 그는 도 당국에 대해서 불신감을 갖기도 하였다.

선교부에서는 오정리에 땅을 매입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그 계획에 차질을 받게 되었고, 매입한 땅은 영수증이 없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땅을 매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타마자 선교사는 한국 전쟁이 끝나자 그 땅을 선교부 앞으로 이전하였다. 타마자 선교사는 전쟁이 휴전으로 중단되자 곧 대전으로 옮겨 땅을 등기하고 대전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광주에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던 일이 취소되었으며, 대전에는 대전시 교외 오정동에 대전선교부를 개설했는데 충남과 대전 지방의 복음선교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한편 광주에 설립하기로 했던 대학을 교통 중심지인 대전에 설립하기로 한 것은 고등교육기관이 호남인에게만 해당될 것이 아니라 중부권, 영남권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인돈 선교사를 대학 책임자로 선임하고, 1956년 4월 10일 대전기독학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82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이때 입학한 학생들은 대개 호남 지방의 미션학교 출신과 고등성경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1959년 2월에는 문교부로부터 대전대학이란 정식 대학 인가를 받고 명실상부한 대학이 되었다. 학장으로 취임한 인돈은 대전시 교외에 있는 오정동 허허벌판의 정지 작업을 하면서 교육 시설을 하나씩 건축해 갔다. 그러나 대학을 만드는 데 정열을 쏟았던 인돈 학장은 그만 건강에 손실을 입고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어서 1960년 8월에 귀국해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향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호남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슬픔에 잠겼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참으로 놀라웠으며,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호남 선교와 한국 선교를 위해 활동하는 그 모습은 호남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였다. 인돈 학장이 쏟아 놓았던 그 정열의 결집이 오늘의 한남대학교를 만들었고 미래를 더욱 알차게 만들어 갔다.

인돈가(家)의 선교 열기는 

계속 타오르고 있다 

세 살에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자란 차롯테 로티(이하 한국명 인사례로 표기)는 1899년 전남 목포에서 배유지 선교사와 로티 위더스푼 선교사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이국 땅에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1901년 4월에 귀국하였다.

우스트대학을 1년간 수료하고, 1921년 스코트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일본 도쿠시마 지방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때 한국 군산에서 선교 사역에 임하고 있던 인돈을 만나 일본 도쿠시마에서 결혼예식을 올리고 군산으로 왔다. 잠시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사로 사역을 하다가 남편을 따라 전주로 이거했던 인사례는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의 강제 출국 명령으로 남편 인돈 선교사와 함께 귀국해 사랑하는 자녀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 그 후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따라 전주선교부에 부임하면서 다시 전주 기전여학교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인사례 선교사는 1949년 3월 3일 복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시설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복교 당시는 4년제 중학교였던 것을 6년제로 연장시키고 전주 지방의 여성지도자 양성의 요람지로 만들었다. 또한 1955년에는 중·고등학교의 학제 변경으로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가 탄생되었으며, 인돈 선교사의 노력으로 1955년 1월 400여 평의 교사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인돈 선교사가 대전대학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자 인사례 선교사는 남편을 따라 대전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1961년 단신으로 목포로 와 어머니가 순교했던 땅 목포의 목포고등성경학교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주일이면 양동제일교회 전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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