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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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휴 선교사의 헌신과 유산… 한국 결핵퇴치와 선교의 길

그녀는 어머니가 다 이루지 못한 일을 마음껏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선교부 일부를 양동제일교회에 내놓고 여자 전도사를 채용하도록 했다. 그녀는 65세 정년을 맞아 그렇게 땀흘려 일했던 호남 선교를 정리하고 1964년 8월에 귀국해 1974년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결핵환자 찾아 나선 인휴 선교사

인돈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전주에서 출생했다. 그 중 휴 매킨타이어(Hugh Mac- Intyre Linton, 한국명: 인휴, 이하 인휴로 표기, 1926~1984) 선교사는 그의 젊음을 한국 선교를 위해 바친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니다가 인돈 선교사의 추방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어스킨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종전과 함께 어스킨신학교를 거쳐서 콜롬비아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수업을 마치고 1954년 아버지가 사역하던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 구역이던 순천선교부에 소속되면서 여천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위한 사역을 감당했다. 그후 순천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병든 수많은 한국인을 살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휴 선교사의 결핵환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의 첫 선교지인 순천 선교 사역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순천 지역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가 한국에 올 무렵 아직도 지리산에서는 공비와 국군이 한창 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계로 지리산을 끼고 있는 마을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님, 큰일났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자꾸 각혈을 하면서 죽을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이때 인휴 선교사는 전도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구례 깊은 산골 마을을 직접 찾아갔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된 젊은 청년이 각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인휴 선교사는 결핵에 걸려 있는 이 청년을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선교임을 깨닫고 광주 제중병원(현재는 광주기독병원)으로 달려가서 결핵약을 구해와 그에게 먹였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의 병세가 너무 오래 되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인휴 선교사는 밤잠을 설치면서 결핵에 대한 치유책을 마련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인휴 선교사는 순천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에 공문을 발송했다.

“교인 중에 결핵환자가 있으면 연락 주시고, 혹시 교인이 아니더라도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용을 여러 차례 발송했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인휴 선교사는 광주 제중병원에 연락해 내과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을 얻어 주말이면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검진을 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 의외로 결핵환자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인휴 선교사는 직접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결핵환자들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결핵은 약으로 충분히 치료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믿은 지역 이장들은 명단을 작성하고 그 명단에 따라서 약을 배포하는 등 결핵퇴치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인휴 선교사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으며, 다시 그의 일터였던 대전 애양원 나환자촌에도 수시로 방문하면서 그들의 치료에 힘을 기울였다.

1984년 4월 10일, 순천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봄소식이 빨리 오는 지역이었다. 이미 인휴 선교사가 살고 있던 순천 선교사촌에도 각종 꽃들이 화창하게 피어 있었다. 이날도 인휴 선교사는 다른 날보다 빨리 애양원에 출근했다. 그런데 환자를 돌보고 돌아오는 길에 광양 쪽으로 가는 길과 순천 쪽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차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에 놀란 사람들은 즉시 순천의료원에 응급을 요했지만 장비부족으로 손을 댈 수 없다고해 할 수 없이 택시에 싣고 광주 제중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광주로 이송하던 중 너무 많은 피를 쏟아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장을 잃은 그의 유족들과 그리고 순천 지역에 있는 수많은 결핵환자들, 또 애양원 식구들의 큰 슬픔 속에 장례가 치러졌다.

그후 유족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다. “구급차, 응급장비를 갖춘 응급차가 필요하다.”

모두 다 구급차만 있었으면 인휴 선교사는 더 살 수 있었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가족들은 곧 미국 교회에 연락해 구급차를 요청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한국 순천에 구급차가 오게 되었다. 그 구급차로 인해서 ‘119구급차’ 제도가 탄생되었다. 그 후 순천결핵사업소의 사역은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플라워 여사가 맡았으며, 그의 훌륭한 업적으로 1996년 5월 삼성재단에서 운영하는 ‘호암봉사상’을 수상했다. 인휴 선교사는 한창 일할 나이인 58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인돈가의 역사는 한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인휴 선교사는 6남매를 두었으며, 그 중 네 명은 전주 예수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첫째 아들 데이비드 요크(1949~)는 시카고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 윈(1950~)은 콜롬비아대학 부설 한국 센터 실장으로 있으며 교수직도 겸하고 있다. 현재 그는 미국에서는 널리 알려진 북한통이며, 1년에도 수없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등 고위직과 대담하면서 평화통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더욱이 1995년 유진 벨100주년기념재단을 만들어 총재로 활동하면서 ‘북한쌀보내기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유진 벨기념재단은 배유지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95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100년이 되던 해에 조직되었다. 역시 사업본부는 미국에 있다.

셋째 제임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건축업을 하고 있다. 넷째는 딸로 그의 남편은 대학 교수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다섯째 앤드류는 유진 벨100주년기념재단 감사로 재직하면서 콜롬비아 대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여섯째인 막내 인요한(John Alderman, 한국명: 인요한, 1959~ 현재)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 소장의 일을 맡고 있다.

귀신이야기 좋아하는 인도아 선교사

한국 선교사를 은퇴하고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소수민족선교회 총무로 활동하는 드와이트(Thomas Dwight Linton. 1927~현재, 한국명: 인도아, 이하 인도아로 표기) 선교사는 인돈 선교사의 둘째 아들로 전주에서 출생했다.

1949년 리치먼드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서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1953년 애틀랜타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953년 11월 14일 광주에 도착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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