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른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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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피난길 <3>

상여 집에서 무서움에 떨며 보낸 하룻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1950년 8월 어느 날 오후였다. 오전 내내 콩 껍질을 벗기라는 사돈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루 끝에 앉아 손톱이 아프도록 시키는 일을 했다. 점심이라면서 보리밥 한 덩이를 오이 냉국에 말아 주는데 얼마나 맛이 있던지….

식사를 마친 후 사돈 할머니는 내게 호박을 따서 줄 테니 지게를 지고 오라고 했다. 난 참으로 난감했다. 지게를 만져본 적도 없고 져본 일도 없는데 그 무거운 호박을 지고 와야 한다니…. 그러나 못한다고 하면 매맞을 일이 두려웠고 밥을 굶길 것 같아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그 당시 열 살 먹는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던 나는 어른들이 지는 지게를 지고 작대기를 들자 지게는 땅에 끌렸고 내 힘으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그 집 딸이 지게 끈을 조금 줄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사돈 할머니를 따라 물을 건너고 논두렁을 건너 상당한 거리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따라오너라” 하면서 앞장서 갔다. 그 당시에는 주로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제법 소리가 났다.

어느덧 호박밭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식구들도 그곳에 와서 참외를 따 상자에 담아 도매로 팔고 있었다. 그 참외 냄새가 얼마나 달게 나던지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하나 먹어 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딴 호박을 내 지게에 가득 싣고 일어서려다가 힘에 부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사돈 할머니는 “이것도 못 지냐. 밥값은 해야지” 하며 발로 차는 것이었다. 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집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선태 녀석은 갖다 버려야 돼” 하며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소가 끄는 수레를 잡고 쫓아오라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니 날은 어두웠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쯤 가서 소와 수레를 세우더니 “넌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 하면서 헛간 같은 곳에 나를 놓고 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도대체 어딜까? 빈 집인가? 누가 사는 곳일까?’ 주위를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상한 것들만 만져졌다. 게다가 깊은 산 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모기떼는 얼마나 많은지… 그때만 해도 여우와 늑대가 나오는 시절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고 만져 봐도 느낌이 이상했다. 몇 발자국을 더듬어 나오자 큰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나무 위로 올라가니 나뭇가지가 세 갈래로 뻗어 있었다. 무서워 떨면서 그 밤을 홀로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냈다. 새벽녘이 되니 사람들이 들로 일하러 나가는지 소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들렸다. 나는 이제는 살았구나 싶어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여기가 어디예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농부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너 도대체 어디서 왔니? 왜 여기에 와 있는 거냐. 여기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담아 상여에 싣고 나가는 곳이란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젯밤에도 느낌이 이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 아저씨는 “너 얼마나 무서웠냐. 밤새도록 여기 있었니?” 하고 물으시며 나를 내려 주시고 마차를 잡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얼마를 가니 밭에서 배추, 열무를 뽑으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아낙네들이 조반을 지어 나오고 있었다. 그 농부 아저씨는 내게 쌀이 섞인 보리밥에 오이지, 열무김치를 넣어 고추장에 비벼서 한 그릇 건네주셨다. 얼마나 꿀맛이던지. 그렇게 맛있는 비빔밥은 내 생전에 처음이었다.

또다시 아저씨는 “너 도대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됐느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선뜻 말할 수가 없어서 “일을 잘못해서 벌을 받은 것이에요” 라고만 말했다. 식사 후 아저씨는 수레에서 짐을 내려놓은 후 고모 집을 찾아서 나를 데려다 주셨다.

나를 보자마자 고모는 “왜 거기서 귀신에게 잡혀가지 않고 왔니? 그 아저씨가 널 데려다 주었으니 이제 창피해서 어떻게 사냐” 하면서 골방에 가두어 놓고 인정 사정없이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순간이 너무나도 끔찍하기만 하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1950년 9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총성과 대포 소리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반공호를 찾아 들어가고, 쫓겨가는 인민군들은 아무 집에나 마구 들어와서 약탈해 갈 무렵이었다. 추석날, 그 난리통에도 부침개를 만들고, 닭을 잡아 국을 끓여 온 식구들이 대청마루에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고모는 나를 뒤뜰에 데려다 놓고 친척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쥐 죽은 듯이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겁이 많은 나는 하라는 대로 몇 시간 동안 잠자코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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