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어느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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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1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아래론 여동생이 하나 있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시던 엄마는 그때부터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다. 나는 대학졸업 후, 입사 2년 만에 결혼을 하였다. 처음부터 시어머니가 좋았다. 시어머님도 처음부터 날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결혼 만 1년 만에 친정엄마가 암 선고를 받으셨다. 난 수술비와 입원비 걱정부터 해야 했다. 남편에게 얘기했다. 남편은 걱정 말라고 하면서 내일 돈을 융통해 볼 터이니 오늘은 푹 자라고 얘기해 주었다. 다음 날, 친정엄마 입원을 시키려 친정에 갔지만,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몇 가지가 있으니 4일 후에 입원하자 하셨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울고 있는데 시어머님의 전화가 왔다. “지은아! 너 울어? 울지 말고… 내일 3시간만 시간 내다오.”  

다음 날 시어머님과의 약속장소에 나갔다. 시어머님이 무작정 한의원으로 날 데려가셨다. 원장님께서 맥을 짚어보시고 몸에 좋은 약을 한 재 지어주셨다. 그리고 백화점에 데려가셨다. 트레이닝복과 간편복도 사주셨고 선식도 사주셨다. 어머니께서 그제 서야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환자보다 간병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 병원에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먹지 말고,” 말씀하시며 봉투를 내미셨다. “엄마 병원비 보태 써라. 네가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무슨 돈이 있겠어? 그리고 이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랑 비밀로 하자. 네 남편이 병원비 구해오면 그것도 보태 써. 내 아들이지만, 남자들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부부싸움 할 때 꼭 친정으로 돈 들어간 거 한 번씩은 얘기하게 돼있어.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알자.” 나는 무릎을 꿇고 시어머님께 기대어 엉엉 울고 있었다. 

2천만 원이었다. 친정엄마는 그 도움으로 수술하시고 치료받으셨지만, 이듬해 봄에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오늘이 고비라고 하였다. 눈물이 났다. 남편에게 전화했고, 나도 모르게 울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시어머님은 늦은 시간임에도 한 걸음에 남편보다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하셨다. 

엄마는 의식이 없으셨다. 엄마 귀에 대고 말씀드렸다. “엄마, 우리 어머니 오셨어요. 작년에 엄마 수술비 어머님이 해주셨어.” 엄마는 미동(微動)도 없으셨다. 시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부인! 저예요. 지은이 걱정 말고. 사돈처녀 정은이도 걱정 말아요. 사돈처녀도 내가 혼수 잘해서 시집 보내줄게요.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그때 거짓말처럼 의식 없는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는 듣고 계신 거였다. 가족들이 다 왔고 엄마는 2시간을 넘기지 못하신 채 그대로 운명(殞命)하셨다. 시어머님은 3일 내내 빈소를 함께 지켜주셨다. 

내 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했다. 시어머님이 또 다시 나에게 봉투를 내미신다. “어머님. 남편이랑 따로 정은이 결혼 자금 마련해놨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 게요.” 다음 순간, 내 통장으로 3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시어머니의 문자가 왔다. 그 길로 시어머님께 달려갔다. 나는 또 울음이 나왔다. 시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은아! 너 기억 안나? 친정엄마 돌아가실 때 내가 약속 드렸잖아! 나 이거 안 하면 나중에 네 엄마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 

제부 될 사람이 우리 시어머님께 따로 인사드리고 싶다 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시부모님, 우리부부, 동생네. 그 때 시어머님이 시아버님께 눈신호를 보내셨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초면에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사돈처녀 혼주자리에 우리가 앉았으면 좋겠는데~” 혼주자리엔 사실 우리 부부가 앉으려 했었다. 내 동생네 부부는 너무도 감사하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결혼식에서 내 동생은 우리 시아버지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하였다. 

오늘은 우리 시어머님의 《49제》였다. 우리가족이 동생네 부부와 함께 다녀왔다. 오는 길에 동생도 나도 많이 울었다. 난 지금 아들이 둘이다. 지금도 나는 내 생활비를 쪼개서 따로 적금을 들고 있다. 내 시어머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나중에 내 며느리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이 글은 어느 수기공모(手記公募)에서 「대상(大賞)」을 받은 글이다. 예전부터 우리 문화에는 ‘고부갈등’이란 것이 있어왔다. 서로의 성장배경이 다르고 겪은 문화가 다른 여인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서 보는 이런 며느리, 이런 시어머니는 실로 놀라운 사례이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모두 이런 모습이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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