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relationship)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가정 안에서의 관계, 사회 안에서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관계 등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관계 맺기 작업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개인을 넘어서면 가정과 가정, 회사와 회사, 교회와 노회, 나라와 나라 등 일견 끈끈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관계들이 넘쳐난다. 한쪽이라도 실수하거나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지치게 된다면 그 끝을 바라보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
관계를 잘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해와 오해가 공존하기 때문에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잘 말하는 것, 배려와 설득의 말하기가 필요하다. 나의 의도를 상대방이 곡해하지 않도록, 온유하고 논리정연하게 표현해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작정 토해내기만 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속담에 내재된 경고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잘 말하는 것에 반해 잘 듣는 것은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 ‘듣다’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이나 동물이 소리를 감각 기관을 통해 알아차리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다’, ‘수업이나 강의 따위에 참여하여 어떤 내용을 배우다’,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다’ 등의 뜻이 나온다. 그냥 귀로만 인지하는 것뿐 아니라 태도나 행동이 뒤따르는 것까지도 듣는 행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유행했던 단어 ‘경청’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경외하고 본받아야 할 한 분, 예수님은 잘 말하고 잘 듣는 분이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복음이었고 듣는 자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으며 심지어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까지도 그 말씀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잘 말하는 것에 있어서 예수님의 에피소드는 당장 여러 내용이 떠오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말씀하시는 것뿐 아니라 잘 들으시는 분이셨다. 백부장, 야이로, 마르다와 마리아, 바디매오 등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마 8:10, 눅 8:50, 요 11:4, 막 10:49) 그들의 하인과 딸과 형제와 그 본인을 고쳐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논리의 오류를 지적하시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선포하셨다. (막 2:17)
작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잘 말하고 잘 듣고 있는가. 일방적인 나의 입장만을 주장하기만 하지는 않는가. 세상 사는 지혜를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구할 뿐이다.
김흥준 장로
<포항노회 장로회장, 포항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