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나라사랑 역사의 필연이 주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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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이란 말은 행복한 말이다. 나라가 없는 서러움은 너무도 끔찍하기에 말이다. 멀고도 기나긴 36년 동안 주권 없이 유랑했던 민족의 지난 역사를 더듬으면 아직도 서러운 한이 풀리지 않는다. 왜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가의 정답이다. 이것이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역사의 필연이 주는 정답이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민족정신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존재를 부인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망국지탄(亡國之歎)의 발로(發露)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민은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과 목표를 향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꿈을 꾸는 의지적(意志的)인 국민이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사사건건 국가가 지향하는 모든 목표를 반대하고 훼방(毁謗)만 한다면 이를 어찌 그 나라에 소속된 사람이라 하겠는가. 

우리들은 영국(잉글랜드)이 일으킨 백년전쟁(AD 1337~AD 1453)을 기억한다. 그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프랑스의 위대한 성녀 잔다르크(Jeann darc, AD 1412. 1. 6.~1431. 5. 30)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백전고초(百戰苦楚) 끝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쟁을 막고 싸워서 이기는 것만은 아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 곧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거창하게 시선을 끌고 효과음이 있는 무슨 위대한 공적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에 버려진 휴지 한 조각을 줍는다든지 남들이 꺼리거나 관심이 없는 일을 보상도 없이 남모르게 하는 선행도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다. 아주 지극히 작은 선행에서 위대한 저력이 강산을 튼튼하게 할 용기가 용솟음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아직도 나라를 사랑하기는커녕 현 시국을 보면, 해방 정국의 혼란과 혼미,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도 없이 모든 것을 힘과 다수로 밀어붙이며 한국적 ‘탄핵 민주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입법부가 행정부의 권한을 함부로 침해하고 있어, 행정부가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아, 유권자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하게 무력화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국정을 맡고 있는 행정부는 소신이 없고 입법을 해야 하는 국회는 뒷짐 지고 갑론을박 세월만 보내고 있다.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하는 소신 없는 행정에 숨통이 막힌다. 무엇을 기획하고 과감하게 추진하는 박진감 넘치는 행정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국회가 왜 이렇게 밉게 보이는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입법의 산실인 국회의 동향은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싸움질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도 부끄럽다. 옛날 구장만도 못한 선량들 같아 정말 한심하기만 한 것이다. 질 좋은 국정을 찾는 수단이라고 하겠지만 백성들은 장님이 아니다. 백성들이 낸 세금은 물 쓰듯 하면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눈이 어두워 사사건건 반대만 하다가 임기를 채우는 것이 국회의 현실이 아니던가. 시대가 요구하는 최선책을 찾아 분골쇄신하고 오직 백성들의 손발이 되어야 할 분들이 백성들의 함성을 도무지 듣질 못하는 것 같다. 나라 사랑이 무엇인지 교육부재의 전당이 너무도 아쉬울 뿐이지만, 차츰 국회의 위상이 달라지길 기대해 본다. 

2024년을 맞는 해방과 광복절은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려니와, 이 나라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선각자, 애국자, 건국자들의 수고가 결코 허사가 되지 않도록 자강(自彊)해야 한다. 자라나는 다음세대가 굴절된 역사물의 오물(汚物)물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국민적 지혜와 애국심을 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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