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쟁과 팽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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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 대한 침공 · 강압 정책

1967년 3월 11일 수카르노로부터 행정권을 이어받은 수하르토는 1945년 헌법과 건국이념인 빤짜실라를 기반으로 하는 신정치 질서를 창조키로 하는 ‘신질서시대’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빤짜실라(Pancasila)는 5개 항의 기본이념으로 신앙의 존엄성(Belief In One and Only God), 인간의 존엄성(Just and Civilized Humanity), 통일 인도네시아(The Unity of Indonesia), 대의 정치 (Democracy guided by the Inner Wisdom In the Unanimity arising out of Deliberationsamongst Representative), 사회정의 구현(Social Justice for the Whole of the People of Indonesia)을 말한다.

신질서시대는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빤짜실라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 정신의 실천 없이는 신체제 목표 달성이 어렵다. 이것은 1945년 헌법과 빤짜실라의 충실한 실천을 근거로 하며 새로운 인도네시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1985년 이후 ‘다양성 속의 통일(Unity through Diversity)’ 정책에 착수했고 빤짜실라 원칙을 각 행정의 기본 목표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32년간의 장기집권을 한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폭동 사태로 인해 통치를 마감하게 되는데 이때 하비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했다. 그리고 2001년 7월에는 여성 대통령인 메가와티 수까르노뿌뜨리(Megawati Sukarnoputri) 대통령이 취임해 경제 회복에 총력을 펼치고 있다. 2004년에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첫 번째 인도네시아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7년 11월 23일 방한해서 24일 정상회담을 가졌고 25일에는 연세대를 방문해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12월 7일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침공해 27번째 주인 티모르티무르 주로 일방적으로 병합했다. 이 침공 당시 민간인 포함 사상자 및 포로만 18만 5천 명에 달하며 인도네시아군도 1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호주 기자 4명과 뉴질랜드 기자 1명이 이 전쟁을 취재하러 동티모르에 갔다가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했으며 그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온 호주 기자 로저 이스트도 동티모르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한 후 바다에 수장당했다.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 발리보(2009)이다.

이후 동티모르는 23년 10개월간 국제 사회의 무관심을 등에 업은 수하르토 군부독재 정권의 잔혹한 식민 통치와 폭정에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약 10~3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추방도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동티모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티모르섬과 가까운 발리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동티모르인들을 서티모르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동화 정책을 펼쳤다. 당시 진행된 이주 정책의 유산으로 딜리 인근에는 푸라 기리나타 힌두 사원이 있는데, 80년대 당시 이주된 발리 힌두교도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동티모르의 재독립 후 발리 이주민들이 다시 떠나고 동티모르의 힌두교도 수는 200여 명에 불과하기에 해당 사원은 현재 거의 폐허로 남아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과 강압 정책은 인종말살정책에 가깝다. 과거 350년 화란인의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한 강압 정책은 극도로 악랄하고 포악하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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