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굳건한 신앙과 한국교회의 사명
김철훈 목사의 헌신과 한국교회 역사적 여정
아무도 현장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날 이순경 목사와 만나기로 했던 집사가 예감이 이상해서 “김 목사가 무사히 연화동교회를 찾아갔을까?” 하고 걱정되어 가던 길을 돌이켜 현장에 가보았는데 거기에 없었다. 다시 산정현교회 사택으로 갔으나 거기도 안 계셨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그는 걱정되어 찾아봤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저녁에 귀가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이틀, 사흘이 지나도 영영 소식이 없었고, 산정현교회 교우들과 가족들의 안타까움만이 더해갔다.
그는 그렇게 납치된 후 희생되었다. 그는 그렇게 갔으나 우리에게 말했다. “인간은 한 번 왔다가 가는 것이지만 정직하게, 그리고 의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없는 모습을 보이자.”
김철훈 목사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에 시무한 정일선(丁一善)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를 대들보처럼 굳건히 지키던 유계준 장로, 청렴 전도인의 대명사인 백인숙 전도사와 충성된 계희중 집사로 이어지는 순교자를 배출한 평양 산정현교회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뿌린 피의 열매는 오늘 한국교회 발전으로 승화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피를 이어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명령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해야만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사명을 따라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오늘을 극복하며 미래를 향해 굳건히 나아가야 한다.
후배 방지일 목사는 김철훈 목사를 가리켜 “강직한 성격으로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분”이라고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 순교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공통점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한치의 타협이나 양보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당에 납치되어 순교 당한 목사의 삶은 마치 한국교회가 겪어 온 고난의 교회사를 압축해 놓은 여정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김철훈 목사가 동평양교회를 시무하면서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에게 설교한 ‘로마를 정복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바울은 드디어 황금 도성, 무력의 요새, 금성철벽을 자랑하던 로마 성에 복음의 폭탄을 던져 점령하고 승리의 개선가를 드높이 불렀다. ‘내가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워 이기고 달려갈 영적 경주를 힘차게 달려 골인하고 믿음을 파수했다’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역설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떠한가? 주위 환경이나 정치적 여건들이 우리 앞에 로마 성처럼 가로막고 있다. 이제 복음의 일꾼 된 십자가 군병들은 모두 복음 폭탄을 가지고 적진을 향해 힘차게 던져야 한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며 용감하게 도전하면 모든 마귀의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지리니, 십자가 군병들은 모두 궐기하여 승리의 진군하자!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반드시 받아 쓰리라.”
순교자 김철훈 목사의 아내 연금봉 전도사는 1909년생으로 100세가 되었다. 그분은 2007년 회고록을 펴내는 등 고령에도 연부역강(年富力强)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금봉 사모는 김철훈 목사에 대해 강직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니셨던 분이라고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