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사역을 마치고 1991년 4월부터 스리랑카에 가서 4년 동안 사역했다. 스리랑카는 세 나라(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서 각각 150년씩 450여 년 동안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마지막 150년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영국은 해안뿐 아니라 내륙까지 침투해 통치하면서 엄청난 면적의 차(tea)밭을 조성하고 이 일을 위해서 인도의 타밀주에서 따로 일꾼을 데려왔다.
타밀족이 스리랑카에 근거를 잡으며 다른 생업, 즉 상업, 관리, 기타 자유업을 하면서 번성해 마침내 본토인 신할리족과 충돌이 생겼다. 1982년 고도(古都)인 캔디(Sacred city of Kandy)에서 생긴 민족 분쟁은 25년 이상 지속된 스리랑카에서 가장 처참한 민족 살육전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 최근에 이르러 타밀 반군 지도자가 사망하면서 내정이 종식되어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스리랑카에 가게 된 것은 그곳에 공장을 세운 한국의 한 기업체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복지 시설을 스리랑카에도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현지에서 얻은 이익을 현지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세울 예정이라며 내게 운영을 부탁했다. 나는 그 기업의 귀한 뜻을 이해하고 동참하기로 했다.
약 3천 평 부지에 진료소와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차츰 시설과 사역을 넓혀나가기로 했다. 어린이집은 현지 교회를 통해 운영하는데, 고아나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20명 가량 양육했다. 나는 매일 아침 진료소 직원들과 같이 기도회를 하고 어린이집으로 갔다.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어린이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진료소가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오전 6시가 되기 전부터 줄을 세우고 번호표를 나눠 주어야 했다. 한국 기업체의 공장 직원 수천 명의 건강관리도 맡아 해주었다. 현지 교회와도 유대관계를 돈독히 했고, 약물 중독자들을 치료해주는 기독교 기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내가 스리랑카에 들어갈 즈음에 다른 젊은 한인 선교사들도 몇 분이 같이 오셨는데, 그때까지 스리랑카의 기독교도는 잠자는 호랑이 같았다. 한번은 현지인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왜 전도를 합니까? 가만히 있어도 교인이 늘어나는데….”
전도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 한국인 선교사는 분발해 현지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기도훈련과 전도훈련을 시키고 부흥회를 열었는데 교회에 뜨거운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지 불교계에서 난리가 났다. 적극적으로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를 죽이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복음을 향한 열심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나는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가 있는 마을을 종종 찾아가 이동진료를 했다.
“현지인들이 보는 데에서는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설명하길 그가 그 마을에 산 지 30년이 넘었고, 교회를 개척한 지는 7년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돌이 날아온다고 했다.
내가 진료를 시작하자 동네 어른인 듯 보이는 할아버지 두 분이 지팡이를 짚고 내 오른편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왼쪽에는 예리하게 생긴 마을 지도자가 앉았다. 나를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날 하루 동안 무려 300여 명을 진료했다.
어느 할머니는 왼쪽 어깨가 아파 여섯 달이 넘도록 팔을 잘 올릴 수 없다고 했다. 환자가 많아서 매우 바빴지만 할머니의 몸을 여기 저기 만져주고 나서 팔을 올려보라고 했는데 쑥 올라갔다. 본인도, 옆에서 보는 사람도 다 놀랐다. 잠시 후 왼쪽에 앉아 있던 마을 지도자가 슬그머니 환자 자리에 앉더니 자기도 봐달라고 했다. 진료가 모두 끝난 후 마을의 지도자가 특별 감사 메시지를 발표했다. 감사하게도 이후로 돌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동진료 한 번으로 무슨 효과가 있으며 얼마나 전도가 되겠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이동진료 후에 교회가 세워진 마을이 여러 곳 있다. 그러므로 단기 의료 선교는 병원 규모로 본다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성령님의 크신 역사하심이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한 군데에 3, 4회 이상 가면 그 영향력이 훨씬 커진다. 이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