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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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속에서 이룩한 개척교회의 역사

그가 광주에 왔을 때는 한국 전쟁이 한바탕 지나간 후여서 지방마다 인민군과 유엔군이 서로 교차하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와 인심이 너무 악화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광주도 말할 것 없었으며, 그래서 모든 농촌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가난한 농촌의 목회자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았던 인도아 선교사는 농촌 교회 목회자의 자립 대책이 없을까 궁리하고 기도하던 중, 양봉사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 조사를 대동하고 곡성군에 있는 몇몇 교회를 지원했다. 양봉에 대한 기술이 없었던 목회자들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끝까지 승부를 건다는 신념에 매달려 이 사업에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일을 계기로 흥미를 갖게 된 인도아 선교사는 점점 사업을 확장하면서 농촌 목회자의 생활 대책에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선교사님, 우리 전도사님은 목회는 안하고 양봉 둥우리만 쳐다보고 삽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인도아 선교사는 광주에 개설되어 있는 성경 학교를 통해서 이들에게 신앙 훈련을 시키기로 하고 농촌 교회에 있는 전도사들을 광주로 불러 모아 이들에게 양봉보다는 교인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농촌 생활이 어려워지자 젊은 일꾼들이 모두 도시로 빠져 나가 농촌 교회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점점 미약해져 가고 있었으며, 선교부 예산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갔다. 게다가 선교사의 인원도 대폭 감소해 갔다.

이러한 문제를 파악한 인도아 선교사는 큰 걱정에 휩싸였다. 한국 선교 100년이 되는 해에 전남 지방, 특별히 섬을 끼고 있는 신안군, 진도군, 완도군 등이 문제였다. 하루속히 섬은 물론 산간 오지까지 복음이 확산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총회 협동사업부(이 기관은 미국연합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한국교회로 조직되었음)는 인도아 선교사와 그의 형 인휴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 도서 지방에 계속적으로 교회를 지원하고 설립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그래서 인도아 선교사는 목포 지방을 맡았으며, 그의 형 인휴 선교사는 순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전주 지방을 각각 맡았다. 이때 인도아 선교사는 광주선교부의 좋은 사역자였던 홍대집 장로를 대동하고 목포노회에 속한 도서 지방을 순회했다. 이들의 목적은 개척교회 지원과 개척교회 후보지 선정이었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한국대표부 총무를 맡고 있던 브라운(G. T. Brown, 한국명: 부명광, 이하 부명광으로 표기) 선교사에게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우선 큰 제안은 등대작전(Light House) 이었다. 아직도 등대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수많은 섬사람들, 그리고 산간 오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운동이었다. 인도아 선교사는 자신이 직접 조사한 결과 아직도 100세대 이상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가 없음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부명광 총무에게 알렸다.

“총무님, 기존 교회로부터 10리 밖에 떨어져 있는 자연부락에 100세대 이상 살고 있는 마을이 많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5년만 지원하면 자립이 가능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명광 총무는 인도아 선교사에게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해서 협동사업부에 제출토록 했다. 이미 전주 지방에도 인휴 선교사와 노우암(호주 선교사) 선교사가 자료를 준비했기 때문에 같이 총회 협동사업부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사업기금을 청원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천 달러가 허락되었으며, 매년 200달러씩 삭감해서 5년으로 마감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받은 인도아 선교사는 등대회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1972년 10월 16일 순천선교부 회의실에서 ‘등대전도회(후에 등대선교회로 개명)’를 발족하고, 위원장에는 인도아 선교사, 한글 서기는 홍대집 장로, 영문 서기로는 노우암 선교사를 각각 선임했다.

등대선교회의 창설은 누가 

막상 등대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다 보니 1년에 200달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인도아 선교사는 개인적으로 모국 교회와 친인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섬 지방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선교지원금을 부탁했다. 그래서 교회가 개척될 만한 지역이 있으면 노회 전도부의 협력을 얻어 천막을 치고 출발했다. 땅은 전도부에서 구입하게 하고 건축과 교역자 생활비는 등대전도회가 맡았다.

열심히 기도하고 출발한 개척교회들은 해가 갈수록 자립하게 되었고, 또 건축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은 총회 협동사업부는 물론 미국 교회와 친지들에게도 상세하게 보고되어 등대전도회의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개척교회가 10년 만에 48개처나 되었으며, 미자립교회도 38개처에나 협조했으며, 교회 건축도 29개처나 완성하게 되었다. 인도아 선교사가 특별히 목포 지방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외할머니가 목포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첫 순교를 한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인재 양성이었다. 소명감 없는 전도사로 하여금 목회를 하라는 것은 마치 면허증 없는 사람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면서 운전하라는 격이 된다면서 철저하게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우선 농어촌과 섬 지방에 있는 유능한 청소년들을 발굴해 목포고등학교에 진학시켰으며 이들의 학비는 모두 등대전도회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목포고등성경학교에서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을 이수하고, 다시 호남신학교(현재 호남신학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10년간(1970~1980) 키운 인물이 목포고등성경학교에서는 연인원 87명이나 배출되었고, 호남신학교에서는 연인원 94명이 졸업해 미자립교회와 개척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했다. 다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 29명을 선발해 장로회신학대학 목연과와 단기과에 진학하게 해 목사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기도 했으며, 이러한 결과 농촌 교회와 섬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활기를 띠고 이 지역의 청소년들에게도 큰 희망을 주었다. 등대전도회의 선교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국 등 여러 교회가 미국 교회의 지원을 얻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이로 인해 미국 교회도 새바람을 만나게 되었다.

인도아 선교사가 농어촌 및 섬 지방 교회에서 성공을 가져오자 호남신학교 재단이사회에서는 그를 호남신학교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가 미국 연합장로교와 통폐합할 때 인도아 선교사는 신앙노선 때문에 미국 남장로교 신앙을 지켜야 한다면서 잔류하게 되었고, 그 교파는 미국 개혁교회로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1978년 한국 선교를 마감하고 귀국했으나 그가 조직했던 ‘등대전도회’는 ‘등대선교회’로 명칭이 바뀌어 계속 그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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