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한 민족혼이 담긴 노래이다. 1919년 삼일운동 때 애국가는 태극기와 함께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애국지사들은 의식이 있을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부터 애국가는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획득했다.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가를 지키고 불러야 할 이유가 된다.
일제강점기 내내 애국가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애국가 가사와 곡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럽고 한 맺힌 일제강점기 35년을 보내고 해방의 감격을 맞아 부르던 애국가는 단순한 노래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광화문 네거리의 신문사 게시판에 붙은 애국가 가사를 너도나도 베껴 보면서 애국가를 눈물로 불렀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 일행이 미군 수송기로 환국하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우리나라가 보이자 애국가를 부르던 그 감격의 순간을 장준하 선생은 『돌베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애국가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울음 섞인 합창, 그것이 그때의 나의 가슴 속에 새로 지어진 애국가다. 기체 안의 노 투사는 마치 어린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달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 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이런 감격의 순간은 언제 또 올 것인가. 통일의 그날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그때도 민족의 감격을 선창자와 지휘자 없이도 합창하게 할 ‘미래의 노래’가 애국가다.”
애국가는 태극기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녹아 있다. 혈연관계처럼 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우리 민족의 어미요 아비가 되었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