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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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의 고급관리 「누사덕(婁師德, 630~699)」은 마음이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성품이 따뜻하고 너그러워 아무리 화날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동생이 높은 관직에 임용되자 동생을 따로 불렀다. 

“우리 형제가 함께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면 남들의 시샘이 클 터인데 너는 어찌 처신할 셈이냐?”하고 물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침을 닦겠습니다.” 동생의 대답에 형이 나지막이 타일렀다. “내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침 같은 것은 바로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저절로 마를 것이야! 화가 나서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서 닦으면 더 크게 화를 낼 것이니 닦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뜻이었다. 

이 이야기는 「타면자건(唾面自乾=얼굴에 뱉은 침은 저절로 마른다)」이라는 글에 얽힌 고사(故事)이다. 1천300여 년 전의 인물인 「누사덕」의 지혜를 현대에 와서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지도자가 있으니 그는 미국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1961~ )」였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의사소통에 직접 나선 오바마 대통령의 개인 ‘트위터(tweeter) 계정’에는 모욕적인 악플이 범람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검은 원숭이는 네 우리로 돌아가라.”는 흑인 비하의 댓글도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을 겨냥한 저속한 비난과 비방의 댓글을 최근까지 지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른바 남들이 자신에게 ‘뱉은 침’이 SNS계정에서 저절로 마르도록 그냥 내버려둔 것이었다. 

오바마의 놀라운 「포용의 정치」가 다시 빛을 발했다. 2017년 12월 26일, 그는 백인 청년의 총기난사로 숨진 흑인 목사 장례식에 참석했다. 추모사를 읽던 오바마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다가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부르기 시작했다. 반주도 없었다. 영결식장을 가득 메운 6천여 명의 참석자는 피부색과 관계없이 모두 일어나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를 함께 따라 불렀다. 어떤 흑인 여성은 오바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추모연설 도중, 희생자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은 오늘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국민들의 박수 소리가 온 미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포용(包容)’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고통스러운 ‘인내’ 없이는 ‘포용’이 불가능하다. 한자어로 「참을 인(忍)」은 “심장[心]에 칼날[刃]이 박힌 모습(刃+心=忍)”을 본뜬 글자이다. 즉 “칼날[刃]로 심장[心]을 후비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인내(忍耐)’이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누구나 가슴에 칼날 하나쯤은 박혀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참느냐 못 참느냐, 거기서 그의 삶이 결판이 난다.

이 문제는 「누사덕」이나 「오바마」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생사가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3%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하고 3%의 따뜻한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고 한다. 세상을 ‘나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는 ‘남의 눈’을 통해서도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꽃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믿음’에 ‘인내’가 더해져야 ‘참된 믿음’이 된다. 미덕 중에 가장 큰 미덕은 ‘인내’이다. ‘인내’보다 더 큰 미덕은 없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세 번 참으면 살인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속담 역시, 모든 일에 참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는 말일 것이다. 

‘인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얘기할 때 중요한 덕목이다. 왜 ‘인내’가 필요할까? 우리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달라서 그렇다. 우리의 우선순위와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달라서 그렇다.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우리가 바삐 서둔다고 일이 빨리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눈앞 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주를 경영하신다. 우리는 기도하고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시간까지 견뎌야 한다.  

미국의 찰스 알렌 목사는 “지능지수인 IQ가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인내지수인 PQ가 높은 사람이 승리한다”라고 했다. 예수님의 삶은 ‘인내의 극치’라 하겠다. 미래에 다가올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던 ‘그리스도의 인내’가 《온전한 인내》라고 히브리서(히12:2) 기자는 말하고 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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