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資本主義)의 특징에 대해 유대계 독일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첫째, 자본주의는 순수한 제의종교(祭儀宗敎)이기 때문에 어떤 교리도, 신학도 알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는 꿈도 자비도 없는 제의(祭儀)의 거행이기 때문에 경배하는 자가 엄청난 긴장을 갖고, 그 모든 성스런 치장을 펼친다는 끔찍한 의미에서 축제가 아닌 날은 없다. 자본주의적 제의는 영원한 지속의 성격을 갖는다. 셋째, 자본주의는 빚을 지게 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게 만드는 제의(祭儀)의 첫 경우일지도 모른다. 넷째, 자본주의적 종교의 신은 숨어있다.
죄는 회개하면 벗어나지만, 빚은 또 다른 빚을 낳는다. 빚진 현실에서 채무자가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빚진 자는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쓸모없는 죄인으로 추락한다. 가중된 채무의식은 생명마저 끊을 만큼 무겁고 무섭다. 이 죄의식은 피하기 어렵다. 빚은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이 보편화된 채무상황이다.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모든 대상을 교환가능한 등가물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맹목적 수익의 추구를 통해 현재의 절망상태를 구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앙을 잉태하고 있는 체제이다. 빚과 채무의 항구화를 통해 절망을 증폭시키는 상황은 지속된다. 이윤추구의 유사 종교적 제의(祭儀) 속에 자리하고, 이 제의는 구원을 약속하는 대신 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빚을 지는 일 – 죄악의 책임을 짊어지는 일뿐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종교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벤야민 뿐만이 아니다. 돈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는 자신을 목적화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우상화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은 마르크스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에, 가령 질서를 파괴한다고 하여 외상(신용대부)이나 이자를 사회에서 추방하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지만 여러 편에 걸친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윤리적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 체제로 보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가치관, 신념 등과 연관된 문화 현상의 하나로 보았다. 자본주의가 생겨나는 데 작용하는 요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며 연결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개신교의 여러 종파 중 칼뱅주의자들은 인생의 목적을 부(富)를 쌓는 데 두는 것은 죄악이지만 성실하게 직업 노동과 금욕적 절제로 부(富)를 이루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가르쳤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들은 금욕적이어야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베버의 논리 덕분에 부(富)의 축적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을 덜 수 있어서인지 세속적 금욕주의를 자진해서 받아들였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종교적 금욕주의는 사라졌다. 왜 돈을 벌고 불려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잃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현실만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확실히 승리를 이루었음에도 작금 자본주의 정신이 사라졌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자본주의 정신을 되찾을 시점이다.
고영표 장로 (의정부영락교회)